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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557
한자 朴智
영어공식명칭 Bak Ji
이칭/별칭 어옹(漁翁),어조 처사(漁釣處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54년연표보기 - 박지 출생
출생지 박지 출생지 - 경기도 풍덕군(豐德郡)[현 개성시 개풍군]
묘소 박지 묘소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진관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무안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은둔한 고려 말 충신.

[개설]

박지(朴智)[1354~?]는 고려 말의 문신으로 조선 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당진시 우두동에 낙향해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낸 충신이다. 박지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세이암(洗耳岩)이 있다. 자손이 번성하여 당진의 대표적인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가계]

박지의 본관은 무안(務安), 호는 어옹(漁翁)이다. 사람들은 박지를 ‘어조 처사(漁釣處士)’라 불렀다. 천우 교위 산원랑(千牛校尉散員郞)을 지낸 박안계(朴安桂)의 아들로, 경기도 풍덕군(豐德郡)[현 개성시 개풍군]에서 출생하였다. 박장(朴杖), 박교(朴橋), 박영(朴楹), 박제(朴梯), 박정(朴楨) 등 아들 다섯을 두었다.

[활동 사항]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자,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南在)박지를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로 천거하였다. 그러자 박지는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말을 남기고 관직을 사임하며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박지는 경학(經學)에 전념하고 절의(節義)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일족을 이끌고 전라도 무안으로 낙향하던 중, 인적이 없던 오지인 당진시 우두동 어리(漁里) 독고지[內道谷村]에 정착하게 되었다.

독고지는 당진천[藍川]이 오른쪽에서 내려오고 왼쪽에서는 역천(驛川)이 내려와 만나 바다로 흘러가는 곳으로, 박지는 이곳에 초가집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였다. '범절미 산'이라고도 불린 성전산(聖典山) 남쪽 기슭의 큰 바위 끝자락에 홈이 파여 사람이 앉아 낚시질하기에 적당했는데, 박지는 이 바위를 ‘세이암’이라 부르고 역천에서 낚시를 하며 먼 고향을 그리워하였다. 간혹 조선 왕조의 소식이 들리면 바닷물에 귀를 씻었다고 한다. 박지는 후손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되 조선에 출사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묘소]

박지의 묘소는 당진시 고대면 진관리 서개정(西盖井)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지가 사망한 후 후손과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박지가 살던 집터에 사우(祠宇)를 세웠다. 송시열의 6대손인 송치규(宋穉圭)[1759~1838]가 그 집을 ‘내성암(乃成菴)’이라 이름 짓고 서문 시(序文詩)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현재 내성암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1960년경에 후손들이 박지의 묘소 부근에 ‘송정사(松井祠)’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박지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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