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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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自由市場樓院店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요근 |
[정의]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위치했으며, 조선 시대 한양과 함경도 방면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함경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류의 유통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
[개설]
조선 시대 한양의 동북 방면 관문 지대에 위치했던 누원점(樓院店)은 조선 후기 상업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유통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특히 성저십리(城底十里) 외곽에 위치하여 금난전권(禁難廛權)의 적용을 받지 않았던 까닭에, 누원점의 상인들은 시전 상인들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상업을 영위할 수 있었다. 누원점은 주로 함경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어물(魚物)과 삼베 등을 주요 취급 품목으로 삼았으며, 누원점의 상인들은 한양으로 공급되는 이들 품목에 대한 도고 행위(都賈行爲)를 통해 성장해 나갔다. 금난전권이 폐지되고 누원점에 장시가 형성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누원점은 한양 동북부 유통 경제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유래 및 입지]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의 도봉권역 공영 차고지 및 그 인근이 옛 누원점이 있었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누원점은 한양과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 그리고 함경도를 왕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교통의 요충지로 한양의 동북 방면 관문에 해당하였다. 누원점은 원래 덕해원(德海院)이라고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양주(楊州)에는 덕해원이라고 하는 원(院)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양에서 12㎞[30리] 거리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적인 국가의 통신 및 숙박 시설이었던 관계로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역(驛)과는 달리, 원은 국가에서 지원하는 원주전(院主田)을 재정 기반으로 하여, 교통의 요충지나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되어 여행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반공 반사의 시설이었다. 누원, 즉 다락원은 덕해원의 별칭이었다가 본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덕해원의 건물에 다락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누원점의 출현]
누원이라는 표현은 조선 중기 『선조실록(宣祖實錄)』의 기록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누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덕해원은 『여지도서(輿地圖書)』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지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나, 조선 후기의 일부 고지도에서는 덕해원 대신 누원이라고 칭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원은 별도의 특별한 재정 수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국가로부터 지급된 토지를 기반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자립적으로 운영되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는 원의 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원이 위치했던 곳들 중 교통상의 요지에는 점(店)이 설치되었다. 점은 공적인 기관도 아니고 국가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해당 지역을 지나는 여행객들의 수요에 부응하고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나자, 전국 곳곳에 세워져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점(店)’은 주막이라고도 칭할 수 있으며, 주점(酒店), 여점(旅店), 점막(店幕) 등으로도 불렸다. 주막은 조선 시대 영리를 목적으로 운영되던 전문적 숙박업소로서, 여행객에게 음식과 잠자리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누원점은 누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주점 및 그 배후 점촌을 의미하였다. 즉 원으로서 기능하던 누원[덕해원]이 조선 중기 어느 때부터 그 기능이 점차 위축 상실되면서, 그 역할을 주점이 대체한 것이었다. 누원점 역시 그러한 시대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한양과 함경도 방면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설치된 누원점은 조선 후기 유통 경제의 발전과 함께 이 지역을 지나는 통행 인구가 늘어나면서 점차 그 규모가 확장되어 나갔다. 주막은 상인 등 여행객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창고를 만들어 그들의 물건을 맡아주기도 하고, 마구간을 설치하여 그들이 동반한 소·말·당나귀 등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만큼, 누원점의 규모가 점차 확대되어 그 남쪽에도 주막촌이 생겼으며 윗다락원, 즉 상누원리(上樓院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누원점의 성장]
점촌이 형성되면서, 누원점은 한양과 함경도 방면을 오가는 행인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 함경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관리나 군인 등 변방 방어를 위해 공무로 파견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상품 경제의 발달과 함께 점차 상인들의 왕래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함경도 지방의 특산물인 어물·마포(麻布)·약재 등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이를 거래하는 상인들이 주로 누원점을 이용하였다.
조선 후기 누원점이 한양과 함경도를 잇는 유통 거점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인은 그 위치가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는 한양의 성저십리 밖에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유통 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시전 상인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가 영향을 받자, 정부와의 유착 관계를 통해 민간 상인들을 규제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금난전권의 성립이었다. 금난전권은 법제적으로 사상(私商), 즉 민간 상인들의 활동을 규제하고 한양 도성 내의 시전 상인들에게 독점 판매권을 부여한 상업 특권이었다. 금난전권의 실시로 인해 사상들은 그 활동과 성장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민간 상인들은 금난전권이 적용되지 않는 한양 밖으로 거점을 옮겨서 활동하게 되었다.
대체로 한양의 동북 방면 성저십리는 수유현(水踰峴)과 우이천(牛耳川)의 범위까지 설정되었다. 누원점은 수유현과 우이천으로부터 약 4㎞[10여 리] 가량 북쪽으로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누원점은 도성 안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인 금난전권이 행사되지 못하는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에, 많은 민간 상인들이 모여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누원점에 상인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누원점이 번성하자, 누원점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상인들은 장시(場市)를 개설하여 그들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원점이 한양과 가까웠던 까닭에 시장 잠식을 우려한 시전 상인들의 반대로 장시의 설립은 쉽게 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경에 장시가 개설되었고, 이때부터 누원점은 본격적인 상업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누원점의 취급 물품과 상업 행위]
누원점의 상인들은 누원점이 한양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함경도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품들을 독점적으로 매집하여 판매하는 도고 행위를 행하였다. 함경도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물품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명태·청어·대구 등의 어물과 북포(北布)라고 불렸던 마포, 즉 삼베를 들 수 있다.
함경도의 대표적인 어물이었던 명태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수요가 급증했다. 누원점은 명태와 청어 등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잡히는 어물을 취급하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어물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발전하였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명태를 건조하여 북어로 만들거나 청어, 대구, 문어, 오징어 등을 말려서 상품화하였다. 또한 대구, 명태, 청어의 알이나 멸치 등을 항아리에 담아 발효시킨 것을 상품으로 개발해 유통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어물의 유통은 누원점의 번성을 이끌었던 주요한 동력이었다.
북어 등의 어물과 더불어 이른바 북포라고 불렸던 삼베 역시 누원점의 주요한 도고 대상 물품이었다. 삼베는 여름철 옷감이나 상복(喪服) 및 수의(壽衣)로도 많은 수요가 있었고 교역의 수단, 즉 화폐의 용도로도 사용되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함경도의 북포는 섬세하고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전국의 마포 중 가장 선호되는 제품이었다. 따라서 누원점의 상인들이 한양으로 들어오는 함경도의 삼베 유통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었다.
누원점의 상인들은 어물이나 마포를 대규모로 매점매석하는 도고 행위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였다. 관권과 결탁하여 경제적 이윤을 추구했던 시전 상인과는 달리, 누원점 상인과 같은 사상 도고는 교통의 요지에 거점을 두고 독자적인 자본력과 정보망, 그리고 유통 조직 등을 활용하여 상업 행위를 확장하였다. 특히 누원점의 경우, 금난전권의 적용 범위 밖이면서도 한양과 가까워 한양의 사상 도고인 칠패(七牌)나 이현(梨峴) 일대의 상인들과 용이하게 연결되었다. 또한 한강을 통해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경강상인(京江商人)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누원점의 번영]
누원점 이외에도 서울 근교에는 송파 장시의 상업적 규모가 확대되고 있었으며, 누원점의 북쪽에 위치한 포천의 송우점(松隅店) 역시 사상들의 상업 활동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였다. 이와 함께 누원점과 송우점, 그리고 송파 등 한양 주위에 위치한 몇몇 장시들을 연결하는 사상 도고의 조직망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도하는 상업 유통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조선 후기 시전 상인의 특권적 상업 활동에 대항해 누원점 등이 독자적인 상업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민간 상인들이 독자적인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지에서 한양으로 반입되는 상품을 매점하는 도고 행위를 전개한 것이었다. 누원점 등 민간 상인들의 도고 행위에 대해 엄격히 규제하는 것이 당시 조정의 원칙이었으나, 민간 상인들은 해당 관리들과의 결탁 등의 방법을 통해 도고 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다.
누원점의 번성으로 피해를 입게 된 시전 상인들 중 어물전 상인(魚物廛商人)과 포전(布廛) 상인들이 누원점 상인들에 대한 조정의 압박과 규제를 유도하였다. 누원점이 동북 지역의 어물과 마포 유통을 독점하여 어물전과 포전 상인들이 물건의 확보 가 어려워 영업에 많은 애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중반 이래, 누원점 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누원점에 장시가 번성하는 등 누원점의 상업적 중요성이 높아지자,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누원점까지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원점이 한양의 성저십리 외부에 해당하는 양주의 영역이었으므로 그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1741년(영조 17) 비변사(備邊司)에서도 성저십리 지역 밖에서의 금난전권의 행사를 불허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누원점의 상인이 동북 지역의 어물을 매점한 까닭에, 어물전의 영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한양의 어물 값이 상승했다는 어물전 상인들의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도 누원점 상인들의 도고 행위로 인해 동북 지역의 물품을 구입할 수 없어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포전과 어물전의 탄원이 확인된다.
그러나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1792년(정조 16)에 광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중에 누원점에 들러 주민들의 생활을 살펴보고 그들을 격려하는 등 누원점의 상업 행위를 보장하였다. 결국 18세기 말 통공 정책의 시행으로 시전 상인들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지자, 사상 도고가 이후 19세기의 조선의 전국적 상업 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누원점의 상인들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존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