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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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蘆海出張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서울특별시 도봉구와 성북구 일대를 관할하던 행정 구역.
[개설]
노해출장소(蘆海出張所)는 1914년에 신설되었던 경기도 양주군(楊洲郡) 노해면(蘆海面)이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됨에 따라 설치되었던 현재 도봉구 일대의 행정 구역 명칭이다. 관할 범위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방학동·쌍문동·창동, 노원구 월계동·상계동·중계동·하계동 일대이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기존의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 일대에 1914년 신설된 노해면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리고 해당 관할 지역은 같은 날짜의 서울특별시 조례 제276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성북구 노해출장소가 설치되어 관할하였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에 의해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됨에 따라 서울특별시 조례 제780호에 의해 노해출장소는 폐지되었다.
[관련 기록]
도봉 지역 일대는 조선 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해당하였다. 1750년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당시 해등촌면의 규모로 379호에 남자 742명, 여자 810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내용]
노해면은 1914년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면서 등장한 명칭이다. 여기에는 창동·도봉·방학·쌍문리 등의 지명이 등장한다. 광복 이후 서울의 면적이 점차 넓어지면서 1949년 3월 경기도 고양군 지역과 시흥군 일대가, 1949년 8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수유·미아·번동 지역]이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63년 1월에는 서울특별시의 행정 구역 확장으로 양주군 노해면이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이 일대는 성북구 노해출장소의 관할 구역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모습을 이루는 시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이 일대에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특히 1966~1976년에 창동 지구, 1966~1980년에 도봉 지구가 대상이 되었다. 이후 1973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신설되면서 노해출장소가 폐지되었다. 당시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인구는 65만 명이었으며, 면적은 83.12㎢에 이르렀고, 행정동은 총 22개 동이었다.
[변천]
1970년 5월 18일 노해출장소 관할 지역인 창동에서 쌍문동이 분리·신설되었다.
[의의와 평가]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부터 1973년 도봉구가 분리·신설되기까지 노해출장소가 설치되어 관할하였던 10년 동안 현재의 도봉구 일대는 본격적으로 서울의 외곽 지대에 편입되면서 도시 계획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도심 지역의 인구를 수용하고 농촌에서 올라온 인구를 수용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대규모의 판잣집 정착촌이 조성되었는데, 그 결과 무허가 건축물과 불량 거주지가 난립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는 후에 일어날 주택 개량 재개발 사업을 유발하게 되었고, 도심지 개발로 외곽 지역으로 몰려온 거주민들이 정착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