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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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承克哲夫婦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137-1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대남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3월 9일 - 송극철 부부 묘가 위치한 서울 초안산 분묘군 사적 제44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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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서울 초안산 분묘군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137-11 |
성격 | 분묘 |
관련 인물 | 승극철(承克哲) |
관리자 | 서울특별시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서울 초안산 분묘군에 있는 조선 후기 내시 승극철 부부의 묘.
[개설]
승극철(承克哲)은 내관을 지낸 연양군파(延陽君派)의 시조 김계한(金繼韓)의 손자로 내시부 상세(尙洗)[내시부 종6품직]를 지냈다. 내관들은 양자로 대를 잇기 때문에 손자의 성이 다르기도 하다. 승극철의 출생 및 사망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묘표의 건립 연대가 1643년(인조 12)인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해 왔었다.
하지만 최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승극철 관련 기록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모두 숙종 대인 1676년(숙종 2)과 1682년(숙종 8), 1686년(숙종 12)에 각각 승극철이 ‘존호 옥보 차비(尊號玉寶差備)’·‘주방(酒房)’·‘주사 내관(注事內官)’ 등의 자격으로 종묘의 하향 대제(夏享大祭) 등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아마(兒馬)[어린 말] 한 필씩을 하사받았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승극철은 인조 때가 아닌 숙종 때 활동한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사망한 해도 1687년 이후부터 비가 세워졌을 1694년보다 1년 앞선 1693년까지의 기간 사이로 추정된다.
[위치]
승극철 부부 묘(承克哲夫婦墓)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산137-11번지 서울 초안산 분묘군에 위치한다. 사적 제440호인 서울 초안산 분묘군에는 1,000여 기의 조선 시대 내시를 비롯한 사대부의 무덤이 위치해 있다.
초안산(楚安山)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노원구에 걸쳐 있는 해발 고도 114.1m의 산이다. 도봉산의 주능선과 우이 능선으로 이어진 산줄기의 작은 한 줄기가 남쪽으로 천주교 혜화동 교회 방학동 묘원 뒤 235m 봉우리와 연산군 묘역을 이루고, 다시 도봉구 쌍문동 산80번지 일대 쌍문 공원의 작은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 지맥은 쌍문 전철역 북쪽 고개에서 의정부를 향하는 도봉로를 횡단하여 창동 지역으로 이어지며, 이곳에서 62m 봉우리, 114.1m 봉우리, 102.5m 봉우리가 남북으로 이어져 솟아 있다. 이 능선을 경계로 도봉구와 노원구가 나뉘고, 다시 인덕 대학교 앞에서 월계로를 넘어 성북역 서북쪽 120m 봉우리로 이어진다. 초안산은 서쪽의 우이천과 동쪽의 방학천·중랑천과 만나면서 끝나며, 특히 114.1m 봉우리와 102.5m 봉우리 일대를 초안산이라 부른다.
[형태]
묘는 쌍분으로 좌향은 서향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등을 갖추었다. 묘표는 원수형(圓首形)의 2면 비이고, 비좌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크기는 비신 51.5×16.5×117.5㎝, 비좌 88×33.5×57.5㎝이다.
[금석문]
묘표의 비신 앞뒷면에 명문이 남아 있다. 앞쪽에는 ‘통훈대부 행내시부 상세 승공 극철 양위 지묘(通訓大夫行內侍部尙洗承公克哲兩位之墓)’라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숭정 기원 후 갑술 삼월 일 립(崇禎紀元後甲戌三月日立)’이라 새겨져 있어 1643년(인조 12)에 묘표를 세웠다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 국사 편찬 위원회 서울특별시 사료 조사 위원인 박상진에 의해, 『승정원일기』 등을 확인한 결과 초안산 자락인 매봉산 정상 녹천정 아래 위치한 내시부 상세 승극철의 묘비는 비의 기록[1634]보다 60년 뒤인 1694년 또는 그 이후 세워졌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박상진의 의견에 따르면, 승극철 관련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만 세 건이 확인된다.
모두 숙종 대인 1676년과 1682년, 1686년에 각각 승극철이 ‘존호 옥보 차비’·‘주방’·‘주사 내관’ 등의 자격으로 종묘의 하향 대제 등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가 아마 한 필씩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다.
이를 통해 승극철은 인조 때가 아닌 숙종 때 활동한 인물이며, 사망한 해도 1687년 이후부터 비가 세워졌을 1694년보다 1년 앞선 1693년까지의 기간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오류는 1694년 비를 세울 당시 석공이 ‘재(再)’ 자를 빠뜨렸거나 당시 내관 대부분이 제대로 된 족보나 사대부처럼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行狀)이 없는 탓에 후대에 비를 세우면서 이 같은 오류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황]
초안산 일대에는 수많은 내시 무덤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까지도 동네 주민들이 내시들의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묘비가 없고 봉분의 흙이 깎여 나가 상태로 주인을 확인할 수 없다. 승극철 부부 묘는 초안산 근린공원 안에 밀집되어 있는 조선 시대 내시 묘 중에서 그 형태와 주인을 알 수 있는 묘라는 점에서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