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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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蘆海面馬山里秋收冊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정선 |
[정의]
일제 강점기 현재의 도봉구 창동 등에 소재한 토지에서의 수확물에 대한 도조를 기록한 책.
[개설]
양주군 노해면은 조선 시대의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蘆原面)과 해등촌면(海等村面)이 통합되어 1914년에 설치된 행정 구역이다. 마산리(馬山里)는 현재의 도봉구 창동에 해당한다. 창동의 옛 지명은 말미인데, 옛날 산에다 말을 많이 먹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마산리라고 썼다.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楊州蘆海面馬山里秋收冊)』[奎 27665]은 1915년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마산리, 즉 현재의 도봉구 창동 등에 소재한 전답의 추수책으로서 토지 수확물에 대한 도조(賭租)를 기록한 책이다. 1915년 당시 마산리 지역에 토지를 소유했던 누군가가 소작을 주고 나서 9월 추수한 시점에 소작인들로부터 거둔 도조의 액수를 기록하였다.
[저자]
추수기는 일반적으로 지주, 혹은 그를 대신한 마름이 개인적인 참고용으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저자를 표기하지 않았고, 따라서 저자가 누구인지는 이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다.
[편찬/간행 경위]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은 해당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소작인들로부터 거둘 도조량을 결정하고 그것을 정확히 받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1915년 개인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형태/서지]
한 권으로 되어 있으며, 규격은 가로 20.4㎝, 세로 21.7㎝이고, 표지를 제외하고 총 8매이다. 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책의 표지에는 먼저 ‘을묘 구월일(乙卯九月日)’이라고 하여 제작 시점을 기록하고 있고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楊州蘆海面馬山里秋收冊)’이라고 하여 제목을 기재해 두었다. 본문의 기재 양식을 살펴보면, 예컨대 “이완근(李完根) / 횡(橫) 15답(畓) 3야미(夜味) / 3복(卜) 4속(束) / 6두락(斗落) / 조(租) 2석(石) 6두(斗)”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맨 위의 이완근은 소작인, 즉 도조를 지불할 사람의 이름이다. 횡 15는 양안(量案)상에 기재된 자호와 지번을 말하며, 즉 오늘날의 번지에 해당하여 토지의 위치를 가리킨다. 답(畓)이란 이 땅의 지목이 논임을 말한다. 3복 4속은 결부제에 의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며, 6두락은 파종량을 기준으로 한 면적을 말한다. 마지막 난의 조 2석 6두는 이완근이 소작한 토지로부터 1915년 분의 도조로 2석 6두를 거두었음을 말한다.
[의의와 평가]
제목은 모두 다르지만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은 양주군 노해면 일대의 같은 토지에 대한 일련의 추수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1914년의 『노해면 추수기(蘆海面秋收記)』[奎 27673], 1916년의 『양주 노해면 두산리 추수기(楊州蘆海面斗山里秋收記)』[奎27666], 1921년의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 반곡 추수기(楊州郡蘆海面上溪里盤谷秋收記)』[奎 27674] 등과 같은 지역의, 거의 같은 필지에 대한 도조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914년부터 1921년까지의 8년 가운데 4년 분의 추수책이 남아 있으므로, 이 시기의 수확량과 도조량의 변화를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양주 노해면 마산리 추수책』은 1910년~1918년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 중인 시점에 작성된 것으로, 조선 시대까지의 토지 파악 방식과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토지의 위치를 표시하는 방식으로는 조선 시대의 양전(量田) 방식에서 사용되었던 자호와 지번을 부여하는 방식이 사용되었고, 면적을 표시하는 방식도 양안의 결부제(結負制)를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21년에 작성된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 반곡 추수기』에서 토지의 면적을 평(坪) 단위로 기재하고 있는 것과 크게 대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