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4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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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 |
이칭/별칭 | 영춘군(永春君),자정(子靜),이능(李楞),목성(穆成)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종현 |
출생 시기/일시 | 1465년 - 이인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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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74년 - 이인 영춘군으로 책봉 |
몰년 시기/일시 | 1507년 - 이인 졸 |
묘소|단소 | 영춘군 이인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 |
성격 | 왕족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정(子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영춘군(永春君) 이능(李楞)이라 되어 있다.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임천 군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광양 현부인(光陽縣夫人) 진주 유씨(晋州柳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완천군(完川君) 이희(李禧),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등 4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이인(李仁)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외할머니에게 의지하여 자랐으며, 상례와 제사를 지극히 모셔 일가친척이 모두 칭찬하였고 평생 꽃가꾸기를 좋아하였으며 대단히 검소하였다. 1474년(성종 5) 10세 때 영춘군(永春君)에 봉해져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랐고, 5년 뒤에는 승헌대부(承憲大夫)가 되었다. 이어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지낸 후 품계가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이르렀다. 1506년(연산군 12) 둘째 아들 강녕군 이기의 가택(家宅) 사건으로 부자와 형제가 유배당하였으며, 이 때 이인 또한 남해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아들 이기는 꽃밭이 잘 가꾸어진 가택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산군의 애첩이 이를 탐내어 빼앗고자 하였다. 이기가 요구에 불응하자 연산군에게 이를 고자질하였고,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주인과 가노를 붙잡아 가두어 문초하고 결국 유배를 보낸 사건이다. 1507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묘소]
도봉산 남쪽 무수골 기슭[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 도봉동 산82]에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이 위치해 있다. 묘역은 다시 서편과 동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편 묘역 최상단에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묘는 부인 진주 유씨와 쌍분으로 조성하였으며, 봉분 주위로는 뒤가 예각인 오각형의 호석을 둘렀다. 이러한 형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봉분 형태이다. 묘표·향로석·상석·망주석·동자석·장명등 등의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묘표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이 있으나, ‘□□대부 영춘군 증시 목성공 □양 현부인 유씨지묘(□□大夫永春君贈諡穆成公□陽縣夫人柳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이인의 묘 왼쪽 앞에는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된 이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문에는 ‘도봉(道峯)’, ‘노원(蘆原)’ 등의 지명이 금석문으로는 최초로 실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인의 묘 아래로는 영춘군의 손자인 부원 정(副原正) 이희(李㶊)와 평성 수(平城守) 이질(李耊)의 묘가 위치해 있다.
[상훈과 추모]
1507년 정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목성(穆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