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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480
한자 李禧
이칭/별칭 완천군(完川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09년 - 이희 모역 혐의로 유배
묘소|단소 완천군 이희 묘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N37° 40′ 42.3347″, E127° 01′ 34.9447″)지도보기
성격 왕족
성별
본관 전주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의 왕족.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이다. 이인세종신빈 김씨(愼嬪金氏) 사이에서 난 아홉째 서자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아들이다. 할머니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며, 어머니는 중종 때 좌의정까지 지낸 유순정(柳順汀)의 누이동생이자 유양(柳壤)의 딸이다. 부인은 두 명이 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성준(成俊)의 손녀이고, 두 번째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활동 사항]

완천군(完川君) 이희(李禧)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실린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것 정도가 남아 있는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의 삶 일부를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이희연산군 때 형인 이기(李祺)의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다. 이기의 사건이란 나주 기생 출신의 나인 김숙화(金淑華)가 이기의 집을 뺏고자 했는데 이기가 듣지 않자 이기의 노비인 금음동(今音同)이 자기에게 욕을 했다며 무고한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이기를 비롯한 그의 부모, 형제, 처자, 장인이 모두 유배를 갔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다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희 역시 같은 경험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희중종 대에 아버지인 영춘군 이인이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어 종친으로서 지위를 누리는 듯하였지만, 1508년(중종 3) 12월 1일에 모역하였다고 의심받은 박종선(朴從善) 등의 일에 연루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박종선 등을 문초한 결과, 이희가 소경 점쟁이한테 가서 자신의 팔자를 물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모역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외삼촌인 유순정이 구원 활동을 하였지만, 이희가 의금부에 잡혀 조사를 받기도 전에 도망쳤기 때문에 상황은 더 어려워졌고, 8일 만에 잡혀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이때부터 대간에서 합사하여 이희가 “두 마음을 품고 모역하였다.”는 내용으로 그를 엄하게 다스리라고 하였고, 반면에 박원종(朴元宗) 등의 공신들은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근거가 없다.”고 하여 이희를 두둔하였다. 양쪽의 다른 의견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이희에 대한 처분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고, 주로 대간에서 이희에 대한 처벌을 간하면 왕이 윤허를 미루는 방식으로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1509년(중종 4) 1월 11일에 마침내 이희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었는데, 왕은 이희를 선원록(璿源錄)에서 삭제하고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하고 외딴 섬으로 유배 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1515년(중종 10) 1월 25일에 이희는 왕명에 의해 유배에서 풀리고, 선원록에도 복적(復籍)되었으며, 이희의 아들이 관직을 받아 다시 종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 다시 동궁을 모해했던 ‘작서(灼鼠)의 변(變)’에 연루되어 삼수(三水)로 유배를 갔지만, 곧 그해 10월 왕의 비망기에 의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묘소]

이희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번지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 있다. 묘는 쌍분이고, 좌향(坐向)은 동남향이며,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동자석·망주석·장명등 등을 갖추고 있다. 묘표의 비신 앞면에는 ‘중의대부 완천군 희 묘 현부인 창녕 성씨 현부인 반남 박씨 부좌(中義大夫完川君禧墓縣夫人昌寧成氏縣夫人潘南朴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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