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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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睦來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로 252-1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출생 시기/일시 | 1617년 - 목내선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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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목내선 증광시 병과 10위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704년 - 목내선 졸 |
부임|활동지 | 목내선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유배|이배지 | 목내선 유배지 - 충청도 당진 |
묘소|단소 | 목내선 묘소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
사당|배향지 | 모현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사천(泗川) |
대표 관직 | 양주 목사 |
[정의]
조선 후기 양주 목사를 지내고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가 있는 문신.
[가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내지(來之), 호는 수옹(睡翁)·수헌(睡軒). 증조할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명인 현헌공(玄軒公) 목세칭(睦世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충정(忠貞) 시호를 받은 목서흠(睦敍欽)이다. 어머니는 권탁(權晫)의 딸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이다. 완양군(完陽君)에 추봉된 이명웅(李命雄)의 딸 전주 이씨(全州李氏), 윤창언(尹昌言)의 딸 해평 윤씨(海平尹氏), 이의근(李義根)의 딸 전주 이씨와 세 번 혼인하여 목임일(木林一)·목임칠(木林七) 등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목내선(睦來善)[1617~1704]은 1650년(효종 1) 증광시에서 병과 10위로 급제하였다. 1654년(효종 5)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사헌부 등의 청직(淸職)을 역임하였다. 1663년(현종 4) 제용감 정을 거쳐 이듬해 종성 부사로 부임하였다. 1671년(현종 12) 2월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나, 7월 사헌부 집의 이하(李夏)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이유는 목내선이 양주 목사로 부임한 이후 위맹(威猛)만을 일삼고 진휼은 포기하였다는 것이었다.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고 형장(刑杖)만을 가하여 온 경내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원망한다는 것을 그 죄목으로 내세웠다. 특히 당시 이임(吏任)의 정처(正妻)는 천인과 구별되는 신분인데도 굶주린 백성들을 성책(成冊)에 올려 기록한 수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체포하라 하여 결국 목을 매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형조참의로 임명되었다.
1674년(숙종 즉위년) 숙종이 즉위한 후, 남인 정권 하에서 형조·이조·예조의 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의 처벌 문제를 두고 남인끼리 대립하였을 때 온건한 쪽인 탁남(濁南)에 속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당시 삭직되었으나 서인 정권 하에서도 1683년(숙종 9) 형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88년(숙종 14)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서인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으며,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충청도 당진으로 원배(遠配)되었고, 1699년(숙종 25)에 풀려났다. 남인의 영수로서 숙종 대 환국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학문과 저술]
예송 당시 남인 예론을 주도하였던 허목(許穆)의 제자로, 남인 계열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楷書)와 초서(草書)를 잘 썼다고 한다.
[묘소]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방학 사거리에서 우이 계곡 방면으로 방학로를 경유하여 가다가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오른쪽에 양효공 안맹담(安孟聃)과 정의 공주(貞懿公主) 묘역이 있는데, 그 능선 동쪽에 사천 목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목내선의 묘는 사천 목씨 묘역 최상단에 위치한 아버지 목서흠의 묘 서쪽에 있다. 단분 합장(單墳合葬)의 형태로 동자석과 망주석, 문인석, 향로석 등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그 외 묘표, 혼유석, 상석, 장명등 등은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사천 목씨 묘역 입구 아버지 목서흠의 신도비 옆에 목내선 신도비가 서 있는데, 1987년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묘역 입구에 있는 모현재(慕賢齋)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