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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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鎰 |
이칭/별칭 | 중경(重卿),능평군(綾平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우택 |
출생 시기/일시 | 1620년 2월 25일 - 구일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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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2년 - 구일 진사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95년 11월 9일 - 구일 졸 |
묘표 | 구일 묘표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묘소|단소 | 구일 묘역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군장리 산93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능성(綾城) |
대표 관직 | 한성부 우윤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묘표가 남아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경(重卿). 증조할아버지는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 왕후(仁獻王后)를 낳은 구사맹(具思孟)이며, 할아버지는 정사공신(靖社功臣) 능성 부원군 겸 병조판서 구굉(具宏)이다. 아버지는 구인기(具仁墍)이다. 구인기는 정사공신으로 능풍군(綾豊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부사과 민헌(閔憲)의 딸이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자녀는 구지정(具志禎)을 비롯해 3남 2녀이다.
[활동 사항]
구일(具鎰)[1620~1695]은 현종 대와 숙종 대에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송시열(宋時烈)의 후원을 받으며 관료로 진출하였고, 현종과 숙종도 각별히 아끼었다. 또한 무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구일의 묘표와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에는 그에 관한 여러 일화가 담겨 있다. 특히 횡성 현감으로 재임할 때 수리(水利) 사업을 펼쳐 백성이 송덕비를 세웠다는 점이 특기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묘표에서는 그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고 기록한 반면, 『현종실록』에서는 남이 대신 쏘아 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훈신(勳臣)의 아들이라는 점이 그에 대한 평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내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구일은 1670년(현종 11) 이후 황해도 병마절도사, 경기 수군절도사, 한성부 우윤, 한성부 판윤 겸 총융사 등 요직을 잇달아 제수 받았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당시 대간의 탄핵으로 삭직을 당한 후 송추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복권되어 지돈령부사와 지훈련원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는 사망한 이듬해인 1696년(숙종 22) 양주의 선영[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부인과 합장묘로 조성되었다. 묘표는 1702년(숙종 28) 세웠는데, 박세당(朴世堂)이 글을 짓고, 아들인 구지정이 글씨를 썼다. 현재 구일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군장리 산93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