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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81
한자 鄭大年
이칭/별칭 경로(景老),사암(思菴),충정(忠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나종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3년연표보기 - 정대년 생
활동 시기/일시 1532년 - 정대년 장원으로 과거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78년연표보기 - 정대년 졸
부임|활동지 정대년 부임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묘소|단소 정대년 묘소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산2
사당|배향지 혁림사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산2
신도비 정대년 신도비 -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산2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동래(東萊)
대표 관직 양주 목사

[정의]

조선 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 조선 전기 의정부 찬성사를 지낸 정구(鄭矩)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예문관 대교를 지낸 정전(鄭荃)이다. 어머니는 이조판서에 추증된 신극정(愼克正)의 딸인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다.

[활동 사항]

정대년(鄭大年)[1503~1578]은 1532년(중종 27)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지평, 장령, 부제학 등을 거쳐 1544년(중종 39) 승정원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그해 중종이 승하하였다. 1552년(명종 7)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수령직을 청하고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이 포함된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양주 목사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얻어서 군적(軍籍)을 개정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았으며, 이듬해인 1553년(명종 8) 가뭄이 몹시 심하였으나 길에 굶어죽어 나뒹구는 시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해 가을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떠나자 양주 주민들이 그를 기념하여 선정비를 세웠다. 정대년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비석을 넘어뜨렸으나 뒤에 주민들이 다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1568년(선조 1) 육경(六卿)[6조 판서]에 합당한 인물을 추천하라 하자 모두 정대년을 천거하여 특별히 한성 판윤에 임명되었다. 이어 각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청백리로 유명하며, 승지로 재임 중 윤원형(尹元衡)의 첩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하자 옳지 않은 일이라고 여겨 고의로 일을 지체시키는 등 윤원형의 권세에도 몸을 굽히지 않았다.

[묘소]

묘는 본래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남쪽[현 경기도 성남시 인근]에 있었으나 1986년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산2번지의 동래 정씨 세장지로 이전하였다. 묘역에는 상석, 상석 받침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 옛 석물이 있으며 동자석, 석양, 장명등은 최근에 신설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묘(合墓)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정대년이 세상을 떠나자 선조가 슬퍼하여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후한 부의(賻儀)를 내렸다고 한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역 아래 세장지 입구에 사당인 혁림사(赫臨祠)가 있으며, 혁림사 내 비각에 1640년(인조 18)에 세운 정대년 신도비[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48호]가 있다. 신도비문은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것으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수록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12.04 이칭별칭, [가계] 수정 <변경 전> 사암(思庵) <변경 후> 사암(思菴)
이용자 의견
정** 이칭/별칭과 [가계]에 사암(思庵)을 사암(思菴)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수정사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백과, 성남의 향토문화대전, 한국학대백과사전의 호보 모두 思菴으로 표기되어 있기에 일치시키고져 합니다.
  • 답변
  • 디지털도봉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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