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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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龍翼 |
이칭/별칭 | 운경(雲卿),호곡(壺谷),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할아버지는 남진(南鎭)이고, 아버지는 부사 남득명(南得明)이며, 외할아버지는 신복일(申復一)이다. 아들은 남정중(南正重)이다.
[활동 사항]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1648년(인조 2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유능한 관료로 인정받았다. 병조좌랑·홍문관 부수찬 등의 요직을 거치고, 1656년(효종 7) 문신 중시에 장원을 하고 당상관에 올라가 예조 참의·승지를 거쳐 양주 목사로 나아갔다. 이후 대사간·대사성·형조판서·예조판서·양관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고루 역임하는 등 화려한 관력을 자랑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송시열(宋時烈)을 공격한 조경(趙絅)에 대해 논죄를 청하거나 윤선도(尹善道)의 석방을 반대하는 등 서인의 입장 중에서도 송시열 쪽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경향을 보였다. 1689년(숙종 15) 1월 소의 장씨(昭儀張氏)가 낳은 아들의 원자 정호(定號) 문제에 대해 서인의 입장에 서서 반대한 것도 그의 정치적 성향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원자의 이름이 정해지자 대제학으로서 명을 받고 반교문(頒敎文)과 반사문(頒赦文)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반교문 가운데 ‘몽란(夢蘭)’ 두 글자가 문제되어 삭탈관작 후 문외 출송되어 1691년(숙종 17) 함경도 명천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뒤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용익이 30년간 청직·요직을 두루 역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문장과 문학에 뛰어나 문명(文名)을 날렸다. 그의 문집인 『호곡집(壺谷集)』은 대부분 시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밖에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 대까지 497명의 명시(名詩)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와 『부상록(扶桑錄)』 등의 저술이 있다.
『호곡집』에는 그가 양주 목사로 재직할 때 지은 칠언 율시인 「양주 동각, 차유능기시운(楊州東閣, 次幼能寄示韻)」, 양주 객사에서 벗들을 만나 수작하며 지은 「배영평대부여제향로소작과학당, 서증 최자정(陪永平大父與諸鄕老小酌跨鶴堂, 書贈崔子挺)」 등 양주에서 읊은 8수의 시가 전한다. 또한 김성백(金聲伯)과 친구 변군거(卞君擧)와 같이 도봉 서원에 머물며 월(月)·산(山)·수(水)의 경치에 대해 읊은 「여김숙성백, 변우군거서 도봉 서원, 야영 삼경(與金叔聲伯, 卞友君擧棲道峯書院, 夜詠三景)」이라는 시가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4년(숙종 20)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된 뒤 관작이 회복되고, 1725년(영조 1)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