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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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端錫 |
이칭/별칭 | 유초(有初),쌍호당(雙壺堂),충민(忠愍)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혜원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초(有初), 호는 쌍호당(雙壺堂). 성종의 아홉째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헌부 집의 이제형(李齊衡)이며, 어머니는 남두명(南斗明)의 딸이다. 부인은 좌랑(佐郞) 이유원(李有源)의 딸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활동 사항]
이단석(李端錫)[1625~1688]은 문음으로 입사해 통덕랑에 이르렀다. 1660년(현종 1)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이 되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정언과 지평을 지내던 중 1667년(현종 8)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한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였다. 2년 후 다시 정언이 되었으며 사간, 집의, 동부승지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부터 1677년(숙종 3) 사이에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가 속해 있던 양주목의 목사와 장단 부사, 광주 부윤 등을 지냈다. 이단석의 양주 목사 재임 시절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1678년(숙종 4)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탐관오리를 숙청하여 수령들의 기강을 바로잡았고, 2년 후에는 동지부사로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귀국 후 각 도의 관찰사를 역임하다가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는데, 평소 남에 대해 비판하기를 준엄하게 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이 탄핵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호해 주었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병을 얻어 죽었다.
[묘소]
묘는 옛 양주목 영역인 현재의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에 있다. 상석 앞에 ‘증 이조판서 행함경감사 완산 이공 단석지묘’라는 문구가 한자로 새겨져 있으며 묘비는 없다.
[상훈과 추모]
사후 이조판서·대제학 등에 추증되었고, 영광의 장천 사우(長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단석은 평소에 청백리로 이름이 매우 높았다. 생전에 치산(治産)에 관심을 두지 않아 가족의 생계가 궁핍하여 사후에 그 부인이 언서(諺書)로 조정에 단자(單子)를 올릴 정도였다. 이에 숙종이 그의 청렴함을 기려 그 가족에게 늠료(廩料)를 주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영조 때도 헌납 채응복(蔡膺福)이 “고(故) 참판 신 이단석(李端錫)은 청백(淸白)하고 청렴하며 근신한 것이 그와 비교될 이가 드뭅니다. 의당 특별히 포상과 증직을 더하여 주시고 그 봉사(奉祀)하는 손자를 수록(收錄)하게 하소서.”라고 상소하여 왕이 이단석의 손자에게 벼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