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00 |
---|---|
한자 | 李濡 |
이칭/별칭 | 자우(子雨),녹천(鹿川),혜정(惠定)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혜원 |
[정의]
조선 후기 도봉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일대를 관할하는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 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후재(李厚載)이고, 할아버지는 장령 이형(李逈)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중휘(李重輝)이며, 어머니는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부인은 관찰사 어진익(魚震翼)의 딸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이다.
[활동 사항]
이유(李濡)[1645~1721]는 1668년(현종 9)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문학, 병조좌랑, 교리, 수찬, 지제교, 헌납, 이조좌랑, 부응교, 사간, 동부승지를 두루 거쳤다. 1682년(숙종 8) 2월 양주 목사로 부임하였는데, 백성들의 이해를 힘써 살펴서 해로운 것은 혁파하고 이로운 것은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예컨대 동창(東倉)을 왕산탄(王山灘)[양주에 있는 지명] 옆에 세우니 주민들이 그 도움을 받았고, 또 해옥(廨屋)을 홍제원(弘濟院)에 세워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니 다른 고을에서도 이를 본받았다. 1682년(숙종 9) 11월 이후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의와 호조참의, 병조참의,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 판윤, 대사헌, 판의금부사, 좌의정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유는 양역(良役)과 관련한 일에 밝아 양역 변통 문제를 담당하기도 하고, 1704년(숙종 30) 「오군문개군제급수군변통절목(五軍門改軍制及水軍變通節目)」, 「군포균역급해서수군변통절목(軍布均役及海西水軍變通節目)」, 「교생낙강자징포절목(校生落講者徵布節目)」을 마련하여 양역의 사무를 크게 정비하였다. 아울러 비현실적인 호포론을 비판하고 교생·원생(院生) 등의 명목으로 군역을 피하는 자에게 군포를 거두는 유포론(游布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묘소]
1726년(영조 2)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혜정(惠定)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 경희궁 터 안에 이유 신도비(李濡神道碑)[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48호]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