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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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世和 |
영어음역 | Bak Sehwa |
이칭/별칭 | 연길(年吉),의당(毅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경일 |
[정의]
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묵재(黙齋) 박경상(朴景祥)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박기숙(朴紀淑)이다. 함경남도 고원군 남흥리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1860년(철종 11)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1870년(고종 7) 향리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포상을 진정하려 하자 부끄럽다며 진정서를 빼앗아 불살라 버리고 안변으로 이사하였다. 다시 충청도 청풍 장선리로 이사해 서당을 세워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882년(고종 19) 영능참봉을 지내다가 2년 뒤 사직하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도사(都事) 윤응선과 함께 문경에서 창의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석방되어 지금의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학문에 전심하였다.
1910년(순종 4) 7월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도 망하고 도(道)도 망하였으니 장차 어찌할고?”라는 글로 결별 인사를 한 후 음식을 전폐하다가 단식 23일만에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창동에 있는 아버지 묘 아래에서 순절하였다.
[학문과 사상]
영남에 있던 전우(田愚)와 성리학에 관해 많은 토론을 하였으며,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영향을 주었다.
[저술 및 작품]
유작으로 『의당집(毅堂集)』4책과 『육례홀기(六禮笏記)』1책이 있다.
[묘소]
원래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 새터에 있던 것을 1932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오리나무골로 이장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추서받았고, 1964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충룡사가 세워져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