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0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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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祥 |
영어음역 | Bak Sang |
이칭/별칭 | 창세(昌世),눌재(訥齋),문간공(文簡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규현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字)는 창세(昌世), 호(號)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박지흥(朴智興)이고,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활동사항]
박상은 성품이 강직·충정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하며 몸가짐이 정숙하여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1496년(연산군 2)에 진사가 되었고, 1501년(연산군 7)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제수되고 박사(博士)에 천거되었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05년(연산군 11)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7년(중종 2)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으나, 9월에 종친들의 등용을 반대하였다가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뒤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갔다. 1508년(중종 3) 종묘서령(宗廟署令)·소격서령(昭格署令)으로 옮겼다가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가 3년 만기 후 사직하고 전라도 광산(光山)으로 돌아갔다. 1511년(중종 6)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敎理)·응교(應敎)를 거쳐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1515년(중종 10) 2월에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고 향표리(鄕表裏)를 하사받았다. 8월에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신씨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중종의 노여움을 샀으나, 정광필·안당의 주선으로 남평(南平)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중종 11) 11월에 재등용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쳐 1517년(중종 12) 순천부사로 나갔다가 어머니상으로 사직했다.
1520년(중종 15) 모친상을 마치고 강릉부사로 부임하였고,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선공감정(繕工監正)을 거쳐 1521년(중종 16) 봄에 상주목사로 갔다가, 여름에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3년간 치적을 남겼다. 이 때 기묘사화로 김세필(金世弼)은 음성 지비천에, 이자(李耔)는 음성 음애동에, 이연경(李延慶)은 충주 수주팔봉에 있었는데,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526년(중종 21) 10월에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나, 이듬해 소소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나주목사에 배수되었다. 평생 청렴결백하여 아부·모함·시기·탐욕을 내는 무리를 볼 때 분토(糞土)같이 여겼고, 충언과 곧은 기운이 추상같아 여러 번 변을 당해도 위엄이 있었다. 퇴계 이황은 박상의 고상한 풍토와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원우(元祐)의 완인(完人)’이라 칭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55년(효종 6) 광주의 월봉서원에 배향하고, 음성 지천서원에 추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