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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100949
한자 李爾瞻
영어음역 Yi Yicheom
이칭/별칭 득여(得輿),관송(觀松),쌍리(雙里),광창부원군(光昌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종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
성별
생년 1560년연표보기
몰년 1623년연표보기
본관 광주
대표관직 판의금부사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좌찬성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며, 이우선(李友善)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이이첨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출생하였다. 천성이 효우하고 제행(制行)이 고결하여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김이 지극하였다. 1593년(선조 26) 광릉참봉에 제수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어, 병조좌랑, 평강현감, 사간원정언, 시강원사서, 1598년 지평, 문학, 홍문관부수찬, 정언, 헌납, 부교리, 수찬, 1599년 이조좌랑, 성균관전적, 문학, 체찰사종사관, 이조정랑을 거쳤다.

1608년(광해 즉위) 병조정랑에 제수되어, 지평, 부교리, 응교, 사간, 집의, 전한, 사인, 사성을 거쳐 문신중시(文臣重試)에 급제하였다. 1609년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의주부윤에 제수되었다. 1610년 대사간, 1611년 병조참지,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1612년 부호군이 되었는데, 전조(銓曹)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한다.

세자빈의 외조부이기 때문에 구례에 따라 가선대부에 오르고, 대사헌, 우부빈객, 대사성을 지내며 정인홍(鄭仁弘)과 뜻을 같이하여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공되어 광창군(光昌君)으로 봉해지고, 2등에 녹훈되어 광창부원군(光昌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여 이듬해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1616년 보국숭록대부가 되고, 1618년 판의금부사, 1620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참형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광릉참봉 이이첨세조의 영정을 받들어 끝까지 보존해냈다. 이이첨은 변란 처음부터 피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의병을 모아 늘 군막에 있었고 또 이번에 적의 불길 속에서 영정(影幀)을 받들어 냈으므로 이이첨을 의롭게 여겼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을 받드는 소북파에 맞서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다가 1608년 유배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의 수제자가 되어 조식(曺植)의 학통을 전수하고 사액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이첨은 소북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토역론(討逆論)을 주장하였고, 영창대군이 죽자 폐모론을 주도하여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정인홍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하였으나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자 식솔을 이끌고 도망가다가 붙잡혔다. 이이첨한찬남, 백대형, 정조, 윤인, 이위경 등과 함께 형을 받았으며, 이원엽, 이홍엽, 이익엽 등 세 아들도 참형되었다. 이이첨 등이 참형을 당하자 도성 사람들이 이이첨의 시체를 난도질하여 시체가 온전한 데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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