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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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鶴洞-金寧金氏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승모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에 살았던 김녕 김씨 충의공파 집성촌.
[개설]
김녕(金寧) 김씨(金氏) 충의공파(忠毅公派)의 파조는 세조의 계유정란 때 충신인 9세 충의공 김문기(金文起)다. 과거 학리에 묘를 쓰고 거주하던 주민 중에 그의 후손들이 있다. 당시 학리는 100여 호를 이루었는데, 그중 30여 호가 김녕김씨였다고 한다. 이들의 거주지는 학동 129일대이다.
[명칭 유래]
학동은 과거 학리로 그때나 지금이나 지형이 학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개포동과 관련하여 이곳에서도 양재천 변에서 숯을 구워 파는 숯장수를 많이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천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학리의 김녕김씨는 16세 김수명(金壽明)에 이르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인 17세 김유징(金有徵)과 그 아들의 묘는 ‘개패’[현 개포동]에 있었고, 둘째 김유선(金有善)의 묘는 경기도 강화에 있다. 첫째 김유징과 그 아들의 묘는 1967년 강남개발로 인해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수암리로 이장하였다. 현재 그곳에는 종친회에서 마련한 가족묘도 있다. 19세에 이르러 이곳 학동에 묘를 썼는데, 25세 형(炯) 자 돌림으로부터 6대조 때의 일이므로 시기적으로는 대략 19세기 전반(前半)에 해당한다. 현 25세로부터 5대조, 즉 20세 김예만(金禮萬)은 김덕록(金德綠)과 김덕노(金德老) 두 아들을 두었다. 20세로부터 갈라진 가호의 수가 150여 호 되었다고 한다. 22세 중에는 천석꾼이 있었는데, 아들 5형제를 두었으며 그 재력으로 신식 교육을 받아 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자연 환경]
본래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 북쪽은 하역일 등으로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고, 강 남쪽은 농부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토양 조건이 논보다는 밭이 많아 근교 농업으로 배를 재배해 팔았다고 한다. 이들 묘의 위치는 지형상 학의 날개에 해당하며 마을은 학의 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현황]
2012년 현재 학동에서 사는 일가는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