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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983
한자 金仁存
영어음역 Kim Injon
이칭/별칭 처후(處厚),김연(金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최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김상기(金上琦)
출신지 강릉
성별
몰년 1127년(인종 5)연표보기
본관 강릉
초명 김연(金緣)
상훈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제향 예종(睿宗) 묘정(廟廷)
대표관직 문하시중판이부사(門下侍中判吏部事)

[정의]

고려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 자(字)는 처후(處厚), 호는 문성(文成), 초명은 김연(金緣).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9세손으로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 김상기(金上琦)의 아들이다. 김인존의 아들은 김영석(金永錫), 김영윤(金永胤), 김영관(金永寬)으로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생애]

과거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된 후 선종·헌종·숙종의 삼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특히 임금의 측근인 내시부(內侍府)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였다. 그 뒤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을 거쳐 개성부사·사인지제고(舍人知制誥)·기거랑(起居郞) 등을 지냈다.

1102년(숙종 7)에 이부낭중 겸 동궁시강학사(吏部郞中 兼 東宮侍講學士)가 되었고, 1105년에는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郞 諫議大夫)를 지냈다. 그 뒤 한림원학사승지·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상주국(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 上柱國)에 올랐다.

1117년(예종 12)에는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를 지냈다.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평정된 뒤 1126년(인종 4)에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이 되고, 이듬해에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守太傅 門下侍中 判吏部事)가 되었다.

[활동사항]

1102년(숙종 7)에 요(遼)나라의 사신 맹초(孟初)가 오자 접대를 맡아 시로써 응접하여 학문의 뛰어남을 크게 칭찬받고, 이 일로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를 맡았다. 이 때 태자로 있던 예종에게 『논어(論語)』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려 강의하기도 하였다.

1105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요나라에 갔는데, 지나는 곳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자, “내가 떠날 때 본국의 군신들이 모두 상복을 입고 통곡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제 요나라에서 후한 대접을 받으니 영광스러우나 차마 신하된 도리로 풍악을 듣지 못하겠다.” 라고 하여 요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을 원수로 삼아 여진을 정벌할 때,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또 1109년 여진이 9성의 환부를 요구하자 방위상의 어려움과 북방 백성들의 희생을 들어 돌려줄 것을 주장해 이를 실시하게 하였다.

1117년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事)로 있을 때 금(金)나라가 요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자 요나라는 내원성(來遠城)과 포주성(抱州城)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이때 군대를 보내 두 성을 수복하고, 의주(義州)를 두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선이 압록강까지 확장되었다.

1122년 인종이 어려서 즉위하여 이자겸이 권세를 잡자 사의를 표명하고 한직인 판비서성사 감수국사(判秘書省事 監修國史)를 지냈다.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후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냈다.

[학문과 사상]

학문을 좋아해 늙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석학으로 그 당시의 조고(詔誥: 조서와 유시문)를 많이 작성하였으며, 중요한 국사마다 왕에게 자문을 하였다.

[저술]

최선(崔璿)·이재(吏載)·이덕우(李德羽)·박승중(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과 지리에 관한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지었고, 박승중과 함께 『시정책요(時政策要)』를 편찬하였으며,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주석을 붙였다.

[상훈과 추모]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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