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6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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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坊內里校虛城 |
영어음역 | Bangnae-ri Gyoheoseong |
영어의미역 | Gyoheoseong Fortress of Bangnae-ri |
이칭/별칭 | 교허성(橋虛城),방내리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김흥술 |
성격 | 성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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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토성 |
건립시기/연도 | 삼국시대 |
높이 | 1.5~7m |
둘레 | 약 900m |
소재지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 |
소유자 | 국유 |
[정의]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에 있는 고대의 토성.
[명칭유래]
보통 방내리성(坊內里城)으로 불리는 토성으로 고허성(稿虛城), 교허성(校虛城)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고현성(古縣城)의 성격을 갖는 성곽이며 또한 인근에 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후에 교허성(校虛城)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고허성(稿虛城)’이라기 보다는 ‘교허성(校虛城)’으로 불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성(城)의 명칭은 기록에 모두 교허성(橋虛城)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 향교가 있다가 없어진 조선후기에 생겨난 명칭이며 인근에 교동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경우 교허성(校虛城)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또한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곡현관중수기(連谷縣館重修記)」에도 교허성(校虛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현(古縣)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방내성(坊內城)이라 칭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위치]
교허성이 있는 연곡면 방내리 지역은 남쪽으로 연곡천이 소금강과 진고개에서 발원하는 물을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 유입되고, 동쪽으로 7번국도가 지나고, 서북으로 세 개의 낮은 구릉(해발 50m)을 포용하고 있는 곳이다. 방내리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영진리, 송림리, 동덕리, 주문진 교항리와 접하고 있는 연곡면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옥계와 마찬가지로 본래 고구려 하슬라(何瑟羅)의 지산현(支山縣)이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잉구(乃舊)이었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연곡현으로 불리기 시작한 곳으로 보이나 지리지마다 기록이 달라 연곡으로 불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여러 지리지들의 연곡현(連谷縣)과 현성(縣城)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방내리성 관련 읍치(邑治) 기록
①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 高句麗, 支山縣, 景德王, 連谷縣
② 『고려사지리지』: 連谷縣 ① +古陽谷縣
③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連谷縣 ①-② 任內. 連谷浦
④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連谷縣 ⓛ-④
⑤『동국여지지』: 連谷縣 ①-④ 같은 내용
⑥『여지도서(輿地圖書)』: 連谷縣
⑦『대동지지』: 古邑 -連谷 ②-⑤와 같음
⑧『여도비지』: 古邑- 連谷縣
[형태]
성의 평면은 방형이며 흙속에 잔자갈을 섞어 쌓은 토성으로 둘레는 약900m 이다. 성문은 남쪽에 2개소, 북쪽에 1개소, 동쪽에 1개소, 모두 4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성벽은 외벽 경사가 45°이며 경사면의 높이가 10~15m에 이르는 곳도 있으며 상부 폭이 1.5m, 내벽 높이는 1m 정도이다. 북서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세이고 동·서·북면에 문지(門址)가 있으며 성내에는 북에서 남으로 3개의 봉우리가 있고 현재 민가 30여 호가 자리하고 있다.
[현황]
역대 지리지에서 이 성의 존재를 누락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오랜 현(縣)터로서 행정적, 군사적 목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조선시대 중기 이후부터 현이 폐지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기록에서 살펴보면 방내리성은 연곡면사무소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토성으로 자연적인 산세를 이용하였고 남문이 있는 산은 인작산(人作山)이라 한다. 그리고 성의 형세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성의 부근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3호 연곡고분(連谷古墳)이 있고, 성내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6호 방내리삼층석탑(坊內里三層石塔)이 있다. 고분, 석탑 등 부근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이 이 성의 특징을 방증하고 있다. 고현성(古縣城)으로 축조되었다가 고려시대 한때 사찰과 연계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 전기에는 현성(縣城)으로 기능하였지만, 중기 이후 현의 폐지와 함께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강릉 지역의 여러 성곽 중 우계성과 함께 고현성으로서 행정성의 성격을 띠는 성이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삼국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다. 행정성, 지역 토호성의 성격을 가진 성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