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0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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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昌錫 |
분야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용균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황창석 신간회 거창 지회 간사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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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황창석 거창 청년 동맹 대의원, 검사 위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황창석 거창 경찰서장 취임 |
성격 | 경찰서장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거창 지회 간사|거창 경찰서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거창에서 청년 운동, 신간회 운동을 벌였던 해방 직후 거창 경찰서장.
[활동 사항]
황창석(黃昌錫)[?~?]은 거창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웅변에 능한 농촌 계몽 사상가로서 거창 청년 운동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었다. 1927년 4월 30일 오후 9시 거창 청년 회관에서 개최된 동아 일보 사옥 낙성 기념 동아 일보 거창 지국 현상 웅변 대회에서 “민중아, 농촌으로 돌아가자”라는 제목으로 참가하여 청년부 2등상을 받았고, 그해 8월 22일 거창 청년 회관 건축 1주년 기념식에서 “민중아, 실업으로”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황창석은 1927년 신간회 거창 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1927년 10월 22일 거창 청년 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거창 지회 창립 대회에서 간사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에는 거창 청년 동맹 간부가 되었다. 거창 청년회가 사회주의 성격을 띤 거창 청년 동맹으로 재창립되어 1930년 4월 5일 거창읍 건계정에서 창립식이 열렸을 때, 거창 청년 동맹 대의원에 피선되었다. 1930년 5월 12일 거창 청년 동맹 제2회 정기 대회 때에는 서기로 선출되었고, 임원 개선 때 검사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청년 운동가로서 거창의 무상 교육 기관인 보성 학원 운영비 마련을 위해 음악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거창군청 산업 기수(産業技手)였던 황창석은 1933년 육지면 공동 재배 행정 절차에 대한 농민들의 대서료를 저렴하게 책정하여 계약했다가 거창 대서인회로부터 업무 방해 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였다.
황창석은 해방 후인 1945년 말 거창 경찰서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민선 군수에 당선되었던 인물은 청년 운동과 신간회 운동을 함께 했던 기독교 민족주의자 주남재였다. 1946년 미군정이 좌익 세력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황창석은 경찰서장직에서 파면되었다. 후임인 정정옥 거창 경찰서장이 거창 청년회의 강좌와 선전을 막고 청년 동맹원을 검거한 것으로 보아 황창석은 당시 좌우의 대립 속에서 좌우 합작으로 건국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