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63 |
---|---|
한자 | 李适-亂 |
영어음역 | Yi Gwarui Nan |
영어의미역 | Yi Gwal's Rebelli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주명준 |
[정의]
1624년 이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의병 항쟁.
[역사적 배경]
선조가 승하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의 대북 정권은 왕권의 확립을 위해 서인과 남인 등 다른 붕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소북계의 지지를 받은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등 무리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 서인 세력이 패륜 행위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켰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발단]
김유, 이귀, 김자점 등은 논공행상에서 실질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을 세운 이괄을 배척하였다. 이에 이괄은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라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경과]
이괄의 군대는 1624년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임진왜란 때 투항한 왜병]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괄의 군대가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였다. 이괄의 난은 결국 도원수 장만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방에서 97명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23명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군병을 모집하거나 군량을 수집해 보낸 사람도 39명에 이른다. 고창 출신의 선비 정춘령(鄭春齡)은 안재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무장 김춘경(金春景)과 흥덕의 송붕(宋鵬) 등은 어가가 공주에 몽진할 때 왕을 호종하였다. 이외에 고창현에서 안진·유철견·조흡·정춘령, 무장현에서 강시언·강흔·김공망·김덕우·김여강·오전·김경철 등이 참여하였다.
[결과]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고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창 지역의 유림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을 맞아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의병이 일으켰으며, 이괄이 개인의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다시 창의하여 저항한 사실은 높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