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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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彦 |
영어음역 | Sangeon |
이칭/별칭 | 설파(雪坡)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옥영 |
성격 | 승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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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
성별 | 남 |
생년 | 1707년 |
몰년 | 1791년 1월 3일 |
본관 | 전주 |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승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속성은 이씨(李氏). 호는 설파(雪坡), 상언(尙彦)은 법명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세손으로, 아버지는 이태영(李泰英)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사항]
상언(尙彦)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이에 19세 때 선운사로 출가하여 희섬(希暹)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봉(蓮峯)과 호암체정(虎巖體淨)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정혜(晦菴定慧)에게도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의 7세손이자 환성지안(喚醒志安)에게는 손자가 된다. 한때 벽암(碧岩)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체정이다.
1739년 용추사에서 처음으로 강좌를 열었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에 통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까지는 중국의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가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 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어렵게 쓰여 있어 공부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는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이에 상언은 일일이 주석을 달고 알기 쉽게 소(疏)니 과(科)니 분류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또한 승재와 부영 등이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에서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청량초적결은과(淸凉抄摘抉隱科)』를 펴냄으로써 후학의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1770년(영조 46)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에 있는 징광사(澄光寺)에 불이 나서 『화엄경(華嚴經)』 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이에 상언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1774년(영조 50)에는 책판이 완성되자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덕유산에 있는 영각사에 새로 장판각을 세워 보관하였다. 그 며칠 전에 호랑이가 절 뒤에서 땅을 후벼 파고 한 승려의 꿈에서도 신이 고하기를, “이곳은 여래의 대경(大經)을 간직할 만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화엄경』을 장판각에 봉안할 때 상서로운 빛이 공중에 서리니 모인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으나, 상언은 우연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 뒤 상언은 영각사에 우거하였는데, 어느 날 주지에게 “절을 이전하지 않으면 반드시 물에 무너질 것이니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큰물이 져서 절이 무너지고 승려들이 많이 빠져 죽었다. 그제야 대중들이 그 신통함에 감복하였다. 이후 상언은 금강산과 묘향산, 두류산 등으로 편력하면서 참선을 했으며, 지리산의 영원암(靈源庵)에서 10여 년을 지내는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 편을 암송했다고 한다.
1790년(정조 14) 섣달에 작은 병에 걸렸다가 다음 해인 1791년(정조 15) 1월 3일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는데,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언은 일찍이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법맥(法脈)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상언으로 이어지며, 뛰어난 제자로는 긍선(亘璇)·성우(性瑀)·홍척(洪倜) 등이 있다. 그는 ‘화엄의 충신’이라고 불릴 만큼 화엄의 전통을 고수한 고승이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청량초적결은과』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묘소]
다비 후 제자들이 영원사와 선운사에 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