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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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向德 |
영어음역 | Hyang Deok |
영어의미역 | Hyang Deok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윤용혁 |
성격 |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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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 |
성별 | 남 |
생년 | 8세기 |
[정의]
신라시대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효자.
[가계]
아버지는 선(善)이다.
[활동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효행이 기록되어 있고, 『동국삼강행실(東國三綱行實)』에 그림과 함께 효행이 소개되어 있다. 755년(경덕왕 14) 봄 심각한 기근이 전국을 휩쓸고 전염병까지 돌았다. 부모 공양이 막연해진 향덕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다. 『삼국사기』향덕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천보 14년(755)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거기에 전염병까지 겹쳤다. 향덕의 부모가 주리고 병들었을 뿐 아니라 어머니는 종기가 나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다. 향덕은 밤낮으로 옷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위안하였으나 봉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먹이고 또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모두 평안하게 되었다.
향(鄕)에서는 이 사실을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아뢰니, 왕이 명을 내려 벼 300곡(斛, 1곡은 10두)과 집 한 채, 그리고 토지 약간을 내렸다. 또 관리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사실을 기록하여 표시하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그곳을 이름 하여 ‘효가리(孝家里)’라고 한다.”
[상훈과 추모]
향덕의 효행을 들은 경덕왕(景德王)의 명으로 포상과 함께 그가 사는 웅천주 판적향(현 충청남도 공주시 소학동의 옛 이름)에 비석과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이는 향덕의 효행을 통하여 옛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로 보인다. 정려를 세워 효행이나 절행을 기리는 것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많이 행하여졌는데, 향덕의 효행에 대한 정려 건립 조치는 대민 교화 시책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유적에 있는 현재의 비는 1741년(영조 17)에 충청도관찰사 조영국(趙榮國)이 세운 것이다. 이 비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