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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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丙浚 |
영어공식명칭 | Choe Byeongj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보라 |
출생 시기/일시 | 1895년 1월 15일 - 최병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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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최병준 숭일학교 교사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최병준 광주 3.10만세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15일 - 최병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 선고받음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5월 5일 - 최병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최병준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최병준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 23-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숭일학교 교사 |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병준(崔丙浚)[1895~1945]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숭일학교 교사로 광주 3.10만세운동을 주동하고 시위를 지휘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의 3.1운동은 부동교 일대의 넓은 벌판에서 처음 일어났다. 김복현[김철(金鐵)], 김강(金剛), 최병준, 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도하여 광주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 학생과 시민의 총동원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각기 책임 분담을 하였지만, 시위 준비와 연락 등에 부족한 점이 많아 1919년 3월 10일로 연기하였다.
숭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들의 참가 권유와 인쇄물 배포를 담당하였다.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기 전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 경고문, 「독립가」 등을 배포하고, 거사일에 일반 주민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최병준은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 시위를 지휘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최병준은 1945년 5월 5일 사망하였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4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