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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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思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곡길 170-30[명도동 50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효주 |
건립 시기/일시 | 1637년 - 영사재[명도동]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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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영사재 -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곡길 170-30[명도동 507] |
성격 | 재실 |
양식 | 골기와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나주오씨 |
관리자 | 나주오씨 |
[정의]
[개설]
영사재(永思齋)[명도동]는 조선 중기 학자이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에 참여한 생노당(生老堂) 오효석(吳孝錫)[1620~1697]이 은거하며 후진을 길렀던 곳으로, 사후에 오효석의 재실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오효석은 광해군 때 본량에서 출생하여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양란에 참여하였으며, 효종의 사망으로 북벌 계획이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쓰다 68세로 사망하였다. 우암 송시열은 오효석을 '대명처사(大明處士)'라 불렀다고 한다. 오효석은 『생로당유고(生老堂遺稿)』를 남겼다.
영사재[명도동]가 있는 곳은 골짜기가 길어 장탄(長灘)이라고도 하는데, 워낙 골짜기가 깊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의병들이 자주 머물며 무기를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전해산 의병부대는 영사재에 주둔하며 무기를 수선하거나 화약과 탄환을 만들었다. 영사재는 한말 의병장 오성술 의병부대의 주둔지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오성술은 집안 사당인 영사재가 대명동천의 가장 깊숙하고 으슥한 곳에 자리한 점을 전술적으로 잘 활용하였던 것이다.
[위치]
영사재[명도동]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명곡길 170-30[명도동 507]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영사재[명도동]는 1637년 오효석이 은서강학소로 건립하였다가 사후에 재각으로 활용되었고, 한말에는 의병의 주둔지와 무기를 제작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형태]
영사재[명도동]는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의 평주 고주를 세운 정면 4칸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분합문이며, 중앙에는 대청과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는 툇마루로 되어 있으며, 5량집이다. 건물 정면에 영사재중수량문(永思齋重修樑文), 대성사예성운(大明祠禮成韻), 차운(次韻) 등이 현액되어 있다.
[현황]
영사재[명도동] 입구에 오상렬(吳相烈)[1887~1907] 의사의 묘소가 있으며, 재실 입구 석문에는 '숭정일월대명별구(崇禎日月大明別區)'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현재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사재[명도동]는 지역의 인물이 강학소로 사용하였던 장소이자 오효석의 외세를 몰아내려는 의지가 담긴 곳이며, 한말 의병이 주둔지로 삼은 역사적인 장소이다.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우고자 한 선조의 얼이 남겨져 있는 공간으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