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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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若恒 |
영어공식명칭 | Kim Yakhang |
이칭/별칭 | 구경(久卿),척약재(惕若齋),광산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사헌집의와 판전교시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김약항(金若恒)[1353~?]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정(金禎), 할아버지는 김영리(金英利),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이다. 형은 김약채(金若采)이다. 아들은 김처(金處)와 김허(金虛)이다.
[활동 사항]
김약항은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와 예의총랑(禮儀摠郎)을 역임하고, 1390년(공양왕 2)에 사헌장령(司憲掌令)이 되었으나 설화(舌禍)를 입어 지곡주군사(知谷州郡事)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10월 강원도염문계점사(江原道廉問計點事)로 파견되었다. 1392년(공양왕 4)에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김약항은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중추원학사(中樞院學士)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명나라에 보냈던 표전문(表箋文) 내용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당시에 전문을 작성하였던 김약항은 1396년(태조 5)에 명나라로 압송되어 억류되었다. 그 후 조선 조정에서는 김약항을 광산군(光山君)으로 봉하였다.
김약항의 사망과 관련된 내용은 분명하지 않다. 1397년(태조 6) 정윤보(鄭允輔)가 김약항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김약항의 집안에서는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이를 신뢰하기 어렵다 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또한, 1402년 양영(楊寧)은 김약항이 운남(雲南)으로 귀양 가서 아내를 얻어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401년(태종 1) 권근(權近) 주청으로 김약항에게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광산군(光山君)에 보국숭록(輔國崇祿)의 위계(位階)를 증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