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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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進 |
영어공식명칭 | Gi Jin |
이칭/별칭 | 자순(子順),물재(勿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바른 |
출생 시기/일시 | 1487년 12월 22일 - 기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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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22년 - 기진 사마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27년 - 기진 경기전참봉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28년 - 기진 전라도 광주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555년 - 기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90년 - 기진 좌찬성 추증 |
거주|이주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
묘소|단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금정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행주(幸州) |
대표 관직 |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에 거주한 문인.
[가계]
기진(奇進)[1487~1555]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물재(勿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판중추부원사(判中樞府院使) 기건(奇虔), 할아버지는 행풍저창부사(行豐儲倉副使) 기축(奇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기찬(奇襸), 어머니는 숙인(淑人) 김씨(金氏)이다. 부인은 두 명인데, 첫째 부인 남양방씨(南陽房氏)는 일찍 사망하였다. 둘째 부인은 강영수(姜永壽)의 딸 진주강씨(晉州姜氏)인데, 5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대림(奇大臨), 기대승(奇大升), 기대절(奇大節)이고,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다.
[활동 사항]
기진은 1487년(성종 18) 12월 22일에 출생하였다. 6세에 아버지를 잃었으나, 널리 배워서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동생 기준(奇遵)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먼저 죽어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를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1527년 천거(薦擧)로 장사랑·경기전참봉(將仕郞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1528년 모친상을 당하였고, 모친상을 마치자 벼슬을 구하지 않고, 전라도 광주(光州)에 은거하였다. 기진은 광주 읍내에서 서북쪽으로 40리[16㎞] 되는 곳에 정착하여 고룡(古龍)이라 하고, 동네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였다. 이후 집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1555년(명종 10) 1월 15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기진이 지은 시문이 수백 편이 있었다고 전하나, 병화(兵火)로 불타 문집이 남아 있지 않다.
[묘소]
기진의 묘소는 기진이 살았던 전라도 광주 금정동(金井洞) 뒷산 기슭에 있고, 비와 상석, 주석 등 석물이 있다고 한다. 기진이 살았던 고룡리는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일대이다.
[상훈과 추모]
기진은 1590년(선조 23) 아들 기대승이 생전에 「종계변무주(宗系辨誣奏)」를 지은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 죽은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덕성군(德成君)에 봉해졌다. 기진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있었던 용동사(龍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용동사는 기진, 기의헌(奇義獻), 임정용(林挺龍), 기언정(奇彦鼎)을 배향했던 사우(祠宇)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