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80 |
---|---|
한자 | 高傅立 |
영어공식명칭 | Go Bulib |
이칭/별칭 | 군회(君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바른 |
[정의]
조선 후기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고부립(高傅立)[1587~1637]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군회(君誨)이다. 할아버지는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1533~1592], 아버지는 효열공(孝烈公) 고종후(高從厚)[1554~1593]이다. 부인은 김충녕(金充寧)의 딸 김씨(金氏), 유수경(柳守敬)의 딸 문화유씨(文化柳氏)이며, 아들은 고두일(高斗一), 고두기(高斗紀), 고두평(高斗平), 고두응(高斗應)이다.
[활동 사항]
고부립은 1587년(선조 20)에 태어났으며 전라도 광주에 거주하였다. 고부립은 지극히 효성스러운 성품이었다. 아버지 고종후가 진주 남강에서 순절해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겨 죄인을 자처하며 항상 삿갓을 쓰고 해를 보지 않았으며, 중문(中門) 밖의 허름한 집에 살며 다른 이와 내왕이 드물었다. 문장이 뛰어났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도 나가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숙부 고순후(高循厚)가 호남의병장으로 천거(薦擧)되자 고부립이 모병유사(募兵有司)를 맡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군사와 식량을 모아 전주(全州)에 이르렀는데,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를 호종(扈從)하여 여산(礪山)[전라북도 익산의 옛 지명]에 갔다가 돌아왔다.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사와 식량을 모아 청주(淸州)까지 갔는데, 강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점차 행적을 감추었다. 1637년(인조 15)에 사망하였는데, 윤선(尹銑)[1559~1639]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