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9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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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蓮采 |
영어공식명칭 | Lee Yeonchae |
분야 | 생활·민속/생활,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숙희 |
출생 시기/일시 | 1916년 - 이연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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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84년 - 이연채 전통음식대회에서 입상 |
활동 시기/일시 | 1987년 - 이연채 문어발을 오려 만든 이바지음식인 어화(魚花)로 신미술대전 특선 |
활동 시기/일시 | 1988년 - 이연채 제12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어화로 입선 |
활동 시기/일시 | 1989년 - 이연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남도의례음식장으로 지정 |
몰년 시기/일시 | 1994년 - 이연채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12월 27일 - 이연채 조카 최영자 남도의례음식장 기능보유자 지정 |
거주|이주지 | 불로동 -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
학교|수학지 |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백서로 13[양림동 242] |
활동지 | 중흥동 -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
성격 | 무형문화재|남도의례음식장 |
성별 | 여 |
본관 | 광산 |
대표 경력 | 남도의례음식장 |
[정의]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남도의례음식장.
[개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로 2002년 광주광역시로부터 남도의례음식장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활동 사항]
이연채[1916~1994]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음식솜씨가 뛰어나 행사용 상차림 음식뿐 아니라 떡살이나 다식판 조각에도 뛰어났고, 술안주 만드는 솜씨로도 이름이 났었기 때문이다. 광산이씨였던 이연채는 외가가 일제강점기 광주의 명문이 된 탐진최씨로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를 다닌 뒤 대촌면 칠석에 살던 서재석과 결혼하였다. 6.25전쟁 때인 34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2남 2녀를 기르면서 불로동에서 하숙집을 운영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대갓집 출장요리사로 불려다니기도 하고, 부자로 살던 외갓집 잔치 일을 도우면서 광주 대갓집들의 잔치상 음식을 고루 익히게 되었다.
이연채는 환갑이 지난 1984년 전통음식대회에서 입상하면서 다식유과, 떡살, 다식판 등으로 여러 보도 매체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문어발을 오려 만든 이바지음식인 어화(魚花)를 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하고, 이듬해에는 제12회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어화로 입선하였다.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되자 제자들이 몰려 전통음식보존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연채는 손수 감나무나 회양목에 각종 문양을 조각칼로 조각하여 떡살을 만들거나 다식판을 만들어 썼다. 이연채의 특기는 역시 폐백 음식과 결혼, 회갑 등 행사 때 차리는 큰상[망상] 음식 만들기이다.
폐백 음식 때 닭을 삶아 은박지를 깃털처럼 오려 붙여 만드는 청홍 봉황새와 문어 및 전복을 오려 만드는 꽃은 음식이 아니라 공예품이었다. 53종의 음식을 신선로에 익혀 내는 열구자탕은 남도음식의 박람회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연채가 차리는 회갑 큰상은 봄에는 닭찜을 올리고, 여름에는 애저를 올렸다. 애저는 결혼 이바지에 찜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연채가 솜씨를 내었던 분야는 특히 홍어찜, 제육찜, 갈비찜, 돔찜, 민어찜 등이었다. 한과류는 약과, 유과, 전과, 다식, 강정, 각종 부각 등으로 맛은 물론이고 그 모양도 아름다웠다. 이연채는 동동주, 조주, 점주(粘酒), 삼해주(三亥酒), 잡주 등의 술빚기에도 능하여 한때는 이 술과 여러 종류의 장아찌, 전 등으로 광주 술꾼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었다.
1989년 광주 중흥동에서 살고 있던 당시 73세의 이연채는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남도의례음식장으로 지정되었으나, 지정 후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8년 뒤 이연채의 조카 최영자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이애섭은 내림을 달리하여 2006년에 지정한 울산 김씨계의 폐백 음식과 이바지 음식장이고, 최영자는 탐진최씨 가계의 음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