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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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泳旭 |
영어공식명칭 | Choe Yeongu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화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 최영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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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2년 - 최영욱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1~1927년 - 최영욱 미국 켄터키대학 의학부 수학, 미국 에모리대학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최영욱 광주청년회 사교부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최영욱 제중원 근무, 서석병원 개원 |
활동 시기/일시 | 1945~1946년 - 최영욱 전라남도부지사, 전라남도지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최영욱 호남신문사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 최영욱 사망 |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부 광주군 |
학교|수학지 | 세브란스연합의학교 -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 |
학교|수학지 | 켄터키대학 - 미국 켄터키주 |
학교|수학지 | 에모리대학 - 미국 조지아주 |
활동지 | 광주청년회 - 전라남도 광주군 |
활동지 | 제중원|서석병원 - 전라남도 광주군 |
활동지 | 전라남도청 - 전라남도 광주군 |
활동지 | 호남신문사 - 전라남도 광주군 |
성격 | 의사|정치인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YMCA 회장|서석병원장|전라남도지사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의료 활동을 전개하고, 미군정기 전라남도지사와 호남신문 사장을 역임한 의사 겸 정치인.
[개설]
최영욱(崔泳旭)은 1891년(고종 28) 전라남도 나주부 광주군[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수기동]에서 아버지 최학신(崔學新)과 어머니 공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은 최흥종(崔興琮) 목사이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다 192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이후 제중원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후 서석병원을 개원하였다. 미군정기 전라남도부지사와 전라남도지사에 임명되었으며, 1947년 호남신문 사장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신촌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있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당시 신문 자료를 보면, 1916년 의사 자격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한국인은 두 명이었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면서 광주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부인인 김필례(金弼禮)도 동행하였다. 김필례는 김규식(金奎植)의 부인인 김순애(金淳愛)의 여동생이었고 김마리아의 고모였다. 유학에 동행한 김필례도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유학 후 1927년 제중원[지금의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광주YMCA에서도 활동하였고, 의사로서 봉사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광주시의사회 4대 회장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제 사업 등에 참여하며 전라남도 광주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었다. 일제 말기 광주YMCA가 일본 기독교청년회 산하의 조선연합회로 예속된 후 광주YMCA 활동을 그만두었다. 이후 서석병원을 개원하고 운영하였다.
광복 이후 전라남도 광주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정이 실시되었다. 최영욱은 전라남도부지사에 임명되어 군정을 이끌었는데. 1945년 12월 3일 정식 발령을 받았으나 1945년 10월말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6년 좌우의 극심한 대립의 상황에서 전라남도지사를 맡았다.
정부 수립 이후 서석병원을 운영하면서, 김규식이 조직하였던 민족자주연맹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에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마하기도 하였다. 총선 직후 6.25전쟁이 발발하였는데, 7월 하순 인민군이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하였을 때 많은 우익 인사들이 피난을 갔지만, 광주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잡혀 수감되었다. 수감된 후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