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279 |
---|---|
한자 | 政治 |
영어공식명칭 | Politics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주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공적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싸고 이루어져 온 개인이나 집단 간의 경쟁이나 조정 과정.
[개설]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은 다양한 인간 관계로 인하여 항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싸고 대립이나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하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정치가 발생했다. 정치는 협의로는 국가 권력에 의해 수행되는 일련의 통치를, 광의로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권력의 획득·유지·행사를 둘러싼 제 집단 간의 투쟁이나 조정과정을 포함한 일련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즉, 정치란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되며, "어떻게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라는 경제 문제와 "어떻게 사회질서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법 질서의 문제가 중시된다.
[변천]
광주광역시의 정치적 행위는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져 왔겠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정치는 광복 이후부터의 정치적 활동들이 더 적합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식민통치는 종결되었고, 그에 맞춰 조선총독부 하부기구로서 전남도청의 권력 장치 역시 종말을 맞았다. 해방 후 정치·행정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방의 명망가들과 활동가들이 건국준비위원회 전남도지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에 맞춰 광주지방의 주민들도 광주지방만을 위해 존립하는 광주건준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광주부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는 전남도인민위원회로,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역시 광주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945년 9월 10일 광주지방에 미군이 처음 들어오는 것을 기점으로 광주지방에도 군정통치가 시작되었다.
미 군정 이후 1948년 5월 10일 제주 일부를 제외한 남한 단독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이 선출되었고, 5월 31일 제헌의회를 개원하였다. 광주에서는 한국민주당의 후보가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헌의회에서 간선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1공화국 기간 동안 총 3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으며, 광주지역에서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1명, 국민회 2명의 후보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1명, 자유당 2명의 후보가,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2명, 자유당 1명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하였으나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하야하게 되었고, 장면을 중심으로 한 의원내각제의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치뤄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정성태 후보·민주당의 김용환·민주당의 이필선 후보가 광주지역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발발하고 그 이후 설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수립되면서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16군사정변으로부터 약 7개월 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개정된 헌법을 바탕으로 1962년 국민투표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 4년 중임제의 대통령 중심제로 복구되었다. 이후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약 한 달 뒤 치뤄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정성태 후보·민주공화당 정래정 후보가 광주지역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이어지는 제3공화국에서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고, 광주지역에서는 신민당 후보 2명이 연달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제3공화국에서는 박정희가 1967년 5월 3일 대선을 통해 6대 대통령이 되었고, 1969년 3선개헌을 통해 7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여 1971년 4월 27일 7대 대선을 통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때 당시의 대선에서는 지역감정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 결과 광주전남지역에서 민주당계의 색채가 강해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어 치뤄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광주지역에서 신민당 후보 2명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종신 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제3공화국의 헌법을 정지시키고 유신헌법 체제인 제4공화국을 수립하여 집권을 이어갔다. 광주지역에서도 이러한 유신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유인물을 살포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신체제가 존속되는 동안에 두 차례 총선이 이뤄졌고, 광주지역에서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 2명이,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 1명과 민주통일당 후보 1명이 당선되었다.
18년에 거쳐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쿠데타와 5.17계엄선포 등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두 차례 당선된다. 이 시기 광주를 비롯 전국에서 군부의 정권 장악에 반발하는 시위가 이뤄졌고,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계엄군이 학생들과 대치를 시작으로 5.18 민주항쟁이 발발하여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다수의 희생자와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5.18 민주항쟁은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의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정신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5공화국 당시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는 총 두 차례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 2명과 민한당 후보 2명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후보 2명, 신민당 후보 2명이 당선되었다. 이 시기인 1986년 11월 1일 광주가 대한민국의 네 번째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의 특별담화를 통해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4.13 호헌조치 반대와 직선제 쟁취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드러나는 것을 계기로 하여 1987년 6월 항쟁이 발발하였다. 이를 통해 제5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대통령 직선제 등을 토대로 하는 9차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 6공화국의 정부는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태우 정부를 시작으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거쳐 2022년 2월 현재 문재인 정부로 이어지고 있다. 노태우 정부 시기에는 2차례 국회의원 선거가 치뤄졌고, 광주지역에서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민당 후보들이,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들이 당선되었다.
문민정부 시기에는 광주직할시에서 광주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어 투표로 국회의원 이외에 각 지방자치 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들까지 선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광주지역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들이 전부 당선된다. 국민의 정부 시절 광주지역에서는 16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 후보 5명과 무소속 후보 1명이 당선되었다. 이어진 참여정부 시절에는 새천년민주당에서 지역주의 타파 등을 외치며 탈당한 이들을 주축으로 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고, 1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광주지역에서 전부 당선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민주당계인 통합민주당 후보 7명과 무소속 1명이 18대 국회의원 선거로 광주지역에서 당선되었으며,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6명, 통합진보당 1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광주지역의 강한 정치적 진보 색채를 보여 주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치뤄진 20대 총선에서는 광주시민들이 구 새정치민주연합에서 호남 측 인사들이 주류가 되어 창당한 국민의당을 크게 지원하여 국민의당 후보들이 전부 당선되었으나, 가장 최근인 문재인 정부에서 치뤄진 21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전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