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1 |
---|---|
한자 | 良心囚-希望洪南淳辯護士 |
이칭/별칭 | 긴급조치 전문가 변호사,시대의 의인,인권 운동의 대부,재야의 대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선화 |
[정의]
8.15광복 이후 광주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고, 이후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 5.18민주화운동 시민수습위원과 진상조사를 위한 투쟁을 전개한 인권 운동가.
[개설]
홍남순(洪南淳)[1912~2006]은 광주 및 전라남도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끈 지도자이며, 양심수들을 위해 변론하였던 인권 변호사였다. 홍남순은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였다.
[가계와 어린 시절]
1912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209에서 아버지 홍창식(洪昌植), 어머니 박도남(朴道南) 사이에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할아버지 홍승규(洪承圭)에게 한문을 배우다 1924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공부를 중단하였다. 1927년 월곡의숙(月谷義塾)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월곡의숙은 제주양씨(濟州梁氏) 문중에서 인근 지역의 학생들에게 근대 교육을 시키기 위해 설립하였다. 홍남순은 월곡의숙에서 근대 교육을 받다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능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능주초등학교]에 편입학하여 1930년 3월 졸업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카야마[和歌山] 시립상공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 졸업하였다. 당시 고학생(苦學生)으로 돈을 벌어 가며 학교를 다녔다. 이어 와카야마 상공학교 특설 법제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 이전 활동 사항]
1940년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귀향을 해서 해남등기소와 화순등기소 서기 일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1948년, 홍남순은 서른여섯의 나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953년 나이 41세에 군법무관으로 입대하여 1957년 군법무관 대위로 만기 제대 후 광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하였다. 1960년 광주고등법원 판사,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장으로 일을 하다 1963년 전라남도 광주시 궁동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하였다.
홍남순이 변호사 개업을 하였던 시점에 정부는 한일 수교를 위한 한일 협정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한일 협정은 일본의 노련한 외교 협상력에 박정희 정권이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일본에 저자세로 굴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이에 온 국민들이 분개하였다. 홍남순은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에서 전남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펼쳤다. 이어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 전남지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민에게 경제개발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정당성의 약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박정희는 고향인 경상북도 포항시, 경상남도 울산시[지금의 울산광역시] 등지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세워서 지지를 끌어올렸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에 비해 전라남도 지역에는 경제개발과 관련되어 공장이 본격적으로 지어지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에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1966년 전남 푸대접 시정 긴급대책위원회를 만들었고, 홍남순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67년 6.8부정선거 전면무효화투쟁위원회 전남지부 위원장,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전라남도 위원장을 맡았다. 홍남순은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창립대회를 마친 다음 피켓을 들고 옛 전라남도청 앞에서 옛 광주지방법원[지금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까지 진출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던 일이 있다. 당시 김녹영, 윤철하, 김영환, 심연식 등과 함께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5년 만에 김응렬 판사에 의해 전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홍남순은 반독재 투쟁에 전면으로 나서기도 했지만 변호사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1965년 한일 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전 국회의원 유옥우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이후 1973년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975년 자작시 「겨울공화국」 낭송으로 파면되고 1977년 장시(長詩) 「노예수첩」으로 인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양성우 시인 필화 사건, 1978년 전남대학교 송기숙 교수 등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등 30여 건의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을 맡았다.
함성지 사건 관련자들에게 전원 접견 금지 처분이 내려지자, 홍남순은 교도소장을 만나 피고인을 접견할 정당한 권리를 방해하지 말라고 담판을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도소장은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고, 홍남순은 교도소장을 상대로 고소까지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접견을 할 수 있게 되도록 홍남순은 그야말로 유신의 암울한 시대에 무소의 뿔처럼 시국 사건 구속자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홍남순에게는 '긴급조치 전문가 변호사', '시대의 의인', '인권 운동의 대부'와 같은 이름이 앞에 붙었다.
1970년대 들어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라남도 대표이사, 1973년 지식인 15인 시국선언,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전남 책임자를 맡았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전남 책임자로 활동하며 홍남순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3일 만에 풀려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하였고, 이어서 6호까지 발동하였다. 1975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전라남도 대표 상임위원, 1977년 국제사면위원회 전남지부 고문을 맡았다. 1978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에 참석하러 갔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지만, 석방이 되자 끝내 참석하였다.
홍남순은 이렇듯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싸우기도 하였고, 긴급조치로 구속된 이들의 변론을 하면서 반유신 운동을 하였다. 홍남순은 점점 박정희 정권과 대치하는 활동을 하면서 민주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인권 변호사와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라는 이름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홍남순은 김재규의 변호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시해하였지만, 이것으로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왔기에 단순한 시해 사건과는 다른 의미를 지녔다. 유신체제의 종말은 당시 민주주의를 염원하였던 모든 이들의 소원이었기에 10.26사태와 김재규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김재규의 변호인에는 당시 홍남순 외에도 이돈명,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등 인권 변호사들이 다수 이름을 올렸다.
[5.18민주화운동과 홍남순]
홍남순은 1980년 2월 민주헌정동지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박정희 사후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유신헌법을 바꾸는 것이었다. 개헌을 염두에 두고 법률가들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10.26사태 이후 국민이 원하는 대로 정국은 흘러가지 않았다.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국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 계획대로 이행하며 점점 권력을 장악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저항하였던 것이 5.18민주화운동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기운이 심상치 않자 홍남순은 잠시 서울로 몸을 피했다. 그렇지만 광주시민이 계엄군에게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을 당한다는 소식에 20일 서울을 출발하여 21일 광주에 도착하였다. 홍남순은 계엄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현장과 시민들을 향한 발포를 목도하였다. 더 이상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수습대책위원회와 협상에 임한 계엄군들은 신군부와는 거리가 있었던 이들이었기에 협상은 지리멸렬하였다. 협상을 진행하던 중 5월 26일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홍남순을 비롯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16명의 위원들은 옛 전라남도청에서 농성광장까지 '죽음의 행진'을 벌이기도 하여,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였다. 그렇지만 다음날인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도청을 진압하여 항쟁은 끝이 났다.
홍남순은 광주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송정역으로 가던 도중 극락강 검문소에서 체포되었다. 홍남순은 보안대로 끌려갔고, 끌려간 날부터 고문이 시작되었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의 의도는 홍남순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꿰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무기회수 방해죄', '학생교사죄', '정부전복기도'와 같은 죄목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70일이 넘는 모진 고문에도 홍남순은 보안사가 원하는 각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변호사 사무실을 뒤지기 시작하였고, 당시 사무장인 정광진을 붙잡아 고문하기 시작하였다. 68일 간의 고문을 받으면서도 정광진은 홍남순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육군 보통군법회의 재판에서 홍남순은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징역 25년으로 감형되었고, 지휘관 확인과정에서 다시 15년으로 감형되어 19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1983년 복권이 되자 홍남순은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이와 함께 1984년 광주5.18구속자협의회 회장,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 등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구속자 가족과 유가족들은 먼저 진상 규명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구속자들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1년 5월 18일 1주기 기념식을 망월동에서 거행하려 하였으나 경찰들이 방해하여 거행하지 못했다. 그러다 1981년 12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성탄절 특사로 모두 나온 뒤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은 더욱 격하고 조직적이 되었다. 홍남순은 광주5.18구속자협의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홍남순은 5공의 군부 세력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야전사령관이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과 싸울 것을 생각지도 못할 때 홍남순은 광주5.18구속자협의회를 이끌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85년 홍남순은 5.18광주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광주사태'로 불렀는데 5.18에 대한 성격을 광주민중혁명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5.18광주민중혁명 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는 홍남순을 비롯해 이기홍, 박석무, 송기숙, 조아라, 조비오, 명노근, 윤광장, 황석영 등 90여 명의 인사가 참여하였다. 5.18광주의거 부상자협의회,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5.18광주의거 유족협의회, 5.18광주의거 구속자가족협의회 등 5.18 관련 단체의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이 총망라되었다.
1985년 전국학생총연합이 미문화원을 점거하여 농성을 하였다. 전국학생총연합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한 것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에게 발포한 책임이 미국에도 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미국에 이를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국학생총연합은 1985년 5월 23일 미문화원 도서관에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 등의 구호를 내걸고 단식 농성을 벌이다 5월 26일 자진해서 농성을 해산하고 연행되었다.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에 홍남순은 변호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변호인단에 합류하였다. 홍남순는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을 통해서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진상 규명을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지원이었다.
홍남순은 1986년 3월 창립된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의장에 추대되었다. 1986년은 전국적으로 개헌 여론이 불처럼 확산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민주세력이 단합하여 개헌운동을 추진하고자 조직한 것이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였다. 6월항쟁으로 개헌이 이루어질 때까지 홍남순은 투쟁의 중심을 이끌었다.
6월항쟁 이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재야의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홍남순은 정치권으로 가지 않고 재야에 남아 민주주의로 가는 바른 길을 모색하였다. 1990년 10월 본업인 변호사 일을 위해 호남합동법률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의의와 평가]
홍남순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였다. 홍남순은 1985년 2월 29일 한국 평신도사도직 협의회 가톨릭대상 정의 부문 수상, 1986년 대한변호사회 회장 증정 인권상, 199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7년 심산 김창숙 선생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1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하다 2006년 10월 14일 사망하였다. 홍남순은 평생을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해 헌신하였고, 민주세력의 대부로서 활동을 한 이 시대의 영원한 재야의 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