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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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漢琫 |
영어공식명칭 | Yun Hanb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우 |
출생 시기/일시 | 1948년 2월 1일 - 윤한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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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71년 3월 - 윤한봉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축산학과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74년 4월 - 윤한봉 전남대학교 제적 |
활동 시기/일시 | 1974년 4월 - 윤한봉 유신헌법 반대 시위로 체포되어 징역 15년형 선고받음 |
활동 시기/일시 | 1975년 - 윤한봉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76년 4월~1977년 12월 9일 - 윤한봉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4월 - 윤한봉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단식투쟁' 지원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11월 - 윤한봉 '전국 농민 쌀 생산자 대회' 참가 농민 숙식 지원 |
활동 시기/일시 | 1978년 12월 - 윤한봉 '송백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79년 6월 - 윤한봉 '현대문화연구소'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80년 5월 - 윤한봉 5.18민주화운동 주동 인물로 현상 수배 |
활동 시기/일시 | 1981년 6월 - 윤한봉 미국 시애틀 도착 |
활동 시기/일시 | 1982년 6월 - 윤한봉 '5.18민주화운동 수난자돕기회'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83년 2월 - 윤한봉 로스앤젤레스 '민족학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84년 1월 - 윤한봉 '재미한국청년연합'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89년 - 윤한봉 '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 미국 의회 전달 |
활동 시기/일시 | 1989년 7월 - 윤한봉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90년 10월 - 윤한봉 유엔 본부 앞에서 15일간 단식 농성 |
활동 시기/일시 | 1993년 - 윤한봉 귀국 |
활동 시기/일시 | 1993년 8월 - 윤한봉 '5.18기념재단' 창립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2004년 6월 29일 - 윤한봉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설립 |
몰년 시기/일시 | 2007년 6월 27일 - 윤한봉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7년 6월 30일 -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7년 6월 30일 - 윤한봉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
학교|수학지 | 전남대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활동지 | 5.18기념재단 -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52[쌍촌동 1268] |
활동지 | 들불열사기념사업회 - 광주광역시 동구 필문대로205번길 10-1[지산동 713-44] |
묘소 |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 |
성격 | 사회운동가|5.18민주화운동 유공자 |
성별 | 남 |
본관 | 해남 |
대표 경력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전라도 지역 책임자|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회장|현대문화연구소 초대 소장|민주청년협의회 전라남도 책임자|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 |
[정의]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윤한봉(尹漢琫)[1948~2007]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전라도 책임자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출소하여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에는 '부활절 예배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그 밖에 1978년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단식투쟁' 지원, '전국 농민 쌀 생산자 대회'에서 농민 800여 명에게 숙식 지원, 양심수 옥바라지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윤한봉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주동 인물로 현상 수배되어 1981년 미국으로 밀항하였다. 미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꾸준히 펼치다가 12년 만인 1993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5.18기념재단 창립을 주도하고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하는 등 일생을 민주화운동에 바쳤다.
[활동 사항]
윤한봉은 1971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하여 그해 12월에 교련 수업 반대 시위에 참여하여 무기정학을 받았다. 1974년 4월 9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전라도 지역 책임자로서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대전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4월 '부활절 예배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대구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1977년 12월 9일 만기 출소한 뒤에는 1978년 4월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단식투쟁' 지원, 11월 '전국 농민 쌀 생산자 대회'에서 농민 800여 명에게 숙식 지원, 12월에는 '송백회'를 결성하여 양심수 옥바라지 지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79년 6월 '현대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뒤 '부마민주항쟁' 발발 직후인 10월 23일 광주서부경찰서에 연행되어 물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가, 12월 9일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석방되었다.
1980년 1월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가 '전국민주청년협의회'에 복속되어 '전국민주청년협의회' 전라남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극단 '광대'의 창립과 문화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의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내란음모죄로 현상 수배되었으며, 1981년 4월 경상남도 마산항에서 밀항하여 35일 만인 6월 3일 미국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미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하였지만 계속 보류되었고, 10월에 노동 허가서를 발급받아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민주화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2년 6월 '5.18민주화운동 수난자돕기회'를 결성하여 1988년 6월 해체할 때까지 3만 달러 이상을 송금하였다. 1983년 2월에는 로스앤젤레스에 '민족학교'를 설립하였고, 그해 5월 로스앤젤레스 프레스클럽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과 밀항 과정을 밝혔다.
1984년 1월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결성하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덴버 등 미국의 10개 지역과 캐나다, 호주, 유럽에도 지부를 결성하였다. 1987년 4월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 허가를 받은 윤한봉은 그해 8월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한겨레]'을 결성하였다. 1988년 5월 '재미한국청년연합'과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의 주도로 '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하여 이듬해 7월까지 11만 명의 서명을 받아 미국 의회에 전달하였다. 1989년 7월에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하였다. 1990년 10월에는 유엔본부 앞에서 남북의 단독 유엔 가입을 저지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15일간의 단식 농성을 벌였다.
1993년 현상 수배가 풀리자 12년 만에 귀국하여 이듬해 8월에 '5.18기념재단'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 뒤 2004년 6월 29일 '노동자의 누이'라고 불린 박기순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인 윤상원, 박용준 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이사장을 맡아 추모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윤한봉은 2007년 6월 27일 폐 이식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6-12이다.
[상훈과 추모]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