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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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後洲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로 735번길 29[옥동 62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현숙 |
건립 시기/일시 | 1911년 - 후주정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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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21년 - 후주정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59년 - 후주정 개축 |
현 소재지 | 후주정 -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로 735번길 29[옥동 624-6] |
성격 | 정자 |
양식 | 골기와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소유자 | 이흥로 |
관리자 | 이흥로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옥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정자.
[개설]
후주정(後洲亭)은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권을 피탈당한 사실에 통탄한 이진영(李振永)이 아버지 이종수(李鐘秀)의 뒤를 이어 1911년에 세웠다. 이진영은 호(號)를 '후주(後洲)'로 삼았는데, 선조인 이중명(李重溟)의 아호(雅號)인 구주(鷗洲) 중에서 '주(洲)'를 취하여 지은 것이다. 후주정에서 400여 명의 후학을 육성하였는데, 퇴락하자 중간에 중수하였다. 이진영 사후에는 제각으로 사용하고 있다.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옥동 천주교 평동성당 옆에 있다. 인근에 금성산과 마을 뒷산이 복룡산이 있는데, 복룡산 정상에는 봉화대를 겸한 성터가 있다. 또한, 서울로 가는 길목인 희어재가 보인다.
[변천]
1911년에 건립하였으나 정자가 퇴락하자 이진영의 제자 및 유림 등의 협조로 1921년에 중건하였다. 이진영 사후에는 제각으로 사용되었으며, 1959년에 중수 또는 중건 기록이 남아 있다.
[형태]
정원을 통해 자연스럽게 경사를 주고, 이곳으로 진입하게 의도하여 지대는 약간 높지만 단벌대 기단으로 전면이 유리문으로 되어 있다. 전통 한옥에서 구조가 개조되어 전통 창호 문양인 띠창살에 창호지 대신 유리를 끼운 유리문이 있다. 용마루는 완연한 곡선이며 팔작지붕으로 골기와를 얹은 겹처마이다. 담장과 벽면은 붉은 벽돌로 쌓았다. 정면의 유리문 4짝을 1칸으로 해서 보면 정면이 3칸이다.
바깥 상부에 현판이 걸려 있다. 내부에 송태회(宋泰會)의 시, 이병수(李炳壽)의 '후주기(後主記)'와 벽에 걸린 주변의 풍광을 읊은 이강헌의 시문이 적혀 있다. 또한, 이진영의 초상화, 이진영의 아버지 이종수의 효행에 관한 취지를 담은 각 향교 유림들의 통문이 액자로 걸려 있다. 그 밖에 이진영의 저서인 『문인록(門人錄)』과 『후주공문집(後洲公文集)』 등이 있으며, 미발간 문고를 보존하고 있다.
[현황]
광산이씨 문중에서 이진영의 제사를 모시는 제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정기적인 관리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후주정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산군, 장성군, 함평군, 영광군, 화순군 등의 지역에서 모인 문하생 400여 명이 모여 가르침을 받은 휴양지 겸 강학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