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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송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87
한자 晩松齋
영어공식명칭 Mansongjae
이칭/별칭 만산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당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있었던 고한주가 후학을 가르친 서당.

[개설]

고한주(高漢柱)[1871~1959]의 자는 방서(邦瑞), 호는 외당(畏堂), 본관은 장흥(長興)으로 창랑(倉浪) 고경리(高敬履)[1559~1609]의 후예이다. 전라남도 광주군 하대곡면 장등[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장등동 장등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1]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밑에서 공부하여 의리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하였다. 만송재(晩松齋)를 짓고 향리에 은거하며 성리를 깊이 연구하였고, 따르는 후학이 많았다.

[위치]

『외당유고(畏堂遺稿)』 권2에 수록되어 있는 시 「사귀(思歸)」에 의하면, 외당 고한주가 살던 집은 '서석산 북쪽에 있으며, 집 앞으로는 우물이 있고 집 뒤로는 아름다운 대나무가 숲을 이뤄 둘러 있는 곳'이었다. 만송재는 이 집의 뒷산에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외당유고』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시 「입산(入山)」에 의하면, 만송재는 꼭 인가와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계시는 마을 가까운 곳에 있어야 늘 왕래하면서 효를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송재 위치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황산마을인 것으로 전해진다.

[변천]

만송재가 건립된 정확한 시기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외당유고』 권1에 수록된 오율(五律) 장편, 「병와유소회정삼삼정형(病臥有所懷呈三三鄭兄) [우원□이수정해](友源□二首丁亥)」에서 '석여입차산(昔余入此山) 만송인지명(晚松因地名) 후문선부군(後聞先父君) 명재이유칭(命齋已有稱)[옛날 내가 이 산에 들어올 적에 지명 따라 만송재라 이름 지었네. 뒤에 듣길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재명으로 일컬음이 이미 있었네.]'라고 적힌 바에 따라 만송재라는 이름의 기원이 지명을 따라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이 시구의 말미에는 '요상십팔공(遙上十八公) 음병와만산(吟病臥晚山)[저 멀리 솟아 있는 소나무 보며, 병 앓으며 만산재에 누워 읊노라.]'이라고 적혀 있는데, 고한주는 1947년 이후 서재의 이름을 만산재(晩山齋)로 개칭하였다.

[형태]

만송재는 관련 시와 문헌에 근거하여 존재가 전해지는 유적으로, 그 형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현황]

현재 만송재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멸된 시기 또한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의의와 평가]

만송재는 고한주가 만년(晩年)에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쓴 곳이기도 하지만 옥수봉의 외로운 소나무, 서석산에 떠가는 흰 구름 등의 경치를 읊으며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탄생시킨 공간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6.28 내용변경 [위치] 외당이→외당 고한주가, [변천] 개명→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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