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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90
한자 集姓村
이칭/별칭 동족마을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정의]

광주광역시 지역에서 같은 본관의 성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

[개설]

한반도에서 같은 본관의 성씨들이 몰려 사는 동족 마을 조사는 1930년 조선총독부 인구조사 때 이루어졌다. 이때 통계를 중심으로 일본 사람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조선의 취락』을 편찬하면서 같은 혈족끼리 많이 모여 살면서 선영을 모시는 제각이나 사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운영하는 동네를 정리한 바 있다. 이후에 같은 본관의 성씨들이 모여 사는 동족마을 조사가 이루어진 일이 없다. 다만 광주시립민속박물관이 2003년 『광주의 동족마을』이라는 보고서에서 동계 조직이나 선영숭모의 제각이나 묘역을 가지고 문중 성원이 계속 활동하거나 종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10개 문중 동네를 소개한 바 있다.

광주광역시는 인구 150만 명에 달하는 광역 도시로 성장하면서 전통적인 동네가 해체되어 성과 본관이 같은 씨족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사는 동네가 사라졌지만, 비록 흩어져 살더라도 혈연공동체 활동을 그치지 않고 선영을 모시고 친목을 도모하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문중은 아직도 적지 않다.

전자대전은 14개 동네에 세거지를 보기로 들고 있지만, 남구 효덕동의 효우동 청주한씨노대동 김해김씨, 함안윤씨, 입암과 화암동네의 천안전씨, 양과동의 지산마을 경주최씨 등 비록 다른 성바지들이 많이 들어와 살지만 씨족공동체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1990년 광주직할시가 향토문화총서 제6집으로 간행한 『광주의 문화유적』에 따르면, 광주 시내에는 선영을 모시는 제각이 120곳, 사우가 30곳이나 되었다. 선조를 기리는 석비만도 129개나 되어 비록 도시화로 같은 본관 성씨들이 모여 살던 동족공동체는 찾아볼 수 없이 변하였지만, 선조를 기렸던 흔적은 아직도 많은 수가 남아 있거나 아예 자리를 옮겼다.

비록 동족마을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 중기 이후 광주 토호 집안의 대표적인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북구 오치동 함평이씨, 문화유씨, 하동정씨, 북구 우치동 죽방촌 김해김씨, 남구 송암동 화암 천안전씨, 남구 양과동 지산 경주최씨, 동구 청옥동 청풍 남평문씨, 광산구 도산동 보성선씨, 광산구 월계동 탐진최씨, 광산구 진곡동 순천박씨, 광산구 안청동 계안 순천박씨, 광산구 오산동 진주하씨, 남구 효덕동 노대 청주한씨, 남구 효덕동 대동 함안윤씨, 서구 금호동 만호 전주이씨, 남구 구소동 구소 금령김씨, 광산구 덕림동 수성 문화유씨, 광산구 북산동 부성 창령조씨 등이다.

집성촌이라고도 부르는 동족마을은 조선 중기 이후에 정착한 동네들이다.

조선 초기 광주 토성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채(蔡), 탁(卓), 진(陳), 허(許), 반(潘), 성(成), 승(承), 이(李), 노(盧), 박(朴), 정(鄭), 김(金), 승(承) 등 13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향리로 들어온 개성김씨, 한산정씨(韓山程氏), 고흥신씨(高興申氏), 강진최씨(康津崔氏)를 덧붙여 놓았으며, 광주에 속한 촌성으로 유씨(庾氏)를 적어 모두 18성이 되는 셈이다. 망성[없어진 성씨]으로 광주에 속한 부곡(部曲)에 있던 김씨를 적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1914년 이후 나주와 함평에 속하였던 지금의 광산구 평동, 삼도동, 임곡동, 본량동의 4개 동이 광역시에 편입되었으므로, 이곳의 집성촌과 주요 성씨인 나주오씨, 박호동 제주양씨, 임곡의 행주기씨, 본양의 청송심씨를 다루기로 한다.

부곡은 이미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없어진 행정구역이었으나 양과부곡과 경지부곡의 성씨는 김(金)이라 하고, 벽진도부곡 성씨는 김씨였으나 없어졌다고 덧붙이고 있다. 성씨의 본관 변화를 추적하다 보면 촌성이나 부곡성, 군현의 토성들은 큰 고을인 목사골 주(州)에 편입되면 본관을 큰고을 이름으로 바꾸는 것으로 보아 광주 3개 부곡 성인 김씨들은 광산김씨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때부터 광주에 살았던 토박이로 태조 왕건 때 이곳 토성을 분정하였다면 광주 본관이라 하였을 것이나,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지을 때 광주 고을은 광산현으로 강등되었을 때이므로 광주의 토성들은 대부분 광주 본관이라 부르지 않고 광산 고을 이름을 본관으로 하였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고려 때 과거 사적을 보면 오늘날 모두 광산김씨라고 정리하고 있는 김약시(金若時)는 광주인이라고 달리 썼고, 신숙주 집안도 고령인이라 하였다가 고흥인이라 한 곳도 있어서 기록자와 기록시기에 따라 혼란이 없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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