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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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謙光 |
영어공식명칭 | Kim Kyeomkwang |
이칭/별칭 | 위경(撝卿),서정(西亭),공안(恭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예조판서, 의정부좌참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겸광(金謙光)[1419~1490]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위경(撝卿), 호(號)는 서정(西亭), 시호(諡號)는 공안(恭安)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약채(金若采), 할아버지는 김문(金問), 아버지는 영의정을 역임한 김철산(金鐵山)이다. 어머니는 대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의 딸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김겸광의 첫째 부인은 유양식(柳陽植)의 딸 진주유씨(晉州柳氏)이고, 둘째 부인은 진계손(陳繼孫)의 딸 삼척진씨(三陟陳氏)이다. 김겸광은 진씨와의 사이에 6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겸광은 1453년(단종 1)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한림(藝文館翰林)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감찰·정언·병조정랑·사헌부 장령 등을 거쳤다. 특히 1460년(세조 6)에는 당시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으로서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군기감정(軍器監正)에 임명되었다. 1461년(세조 7)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시작으로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1465년(세조 11)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었다. 비슷한 시기 형인 김국광(金國光) 역시 호조판서로 재직하고 있었으니, 형제가 나란히 세조의 신임을 받아 요직에 중용되었던 것이다.
김겸광은 평안도관찰사로 오랜 기간 활약하였으며, 예조판서(禮曹判書),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이 즉위한 뒤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나, 이영은(李永垠)과의 사이에서 첩(妾) 문제가 불거져 예조판서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잠깐의 소동이 있었으나 1475년(성종 6)에 정조사(正朝使)로서 명에 파견되는 등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고, 의정부 좌·우참찬에 오르는 등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벼슬자리에 있었다. 김겸광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489년(성종 20)에 광성군(光城君)에 책봉되었다. 『성종실록』의 김겸광의 졸기에는 “천성이 순후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주밀(周密)하였다.”는 평이 보인다. 세종과 문종 사후에는 『세종실록』, 『문종실록』 편찬에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겸광은 1461년(세조 7)에 『북정록(北征錄)』 교감과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책은 1453년(단종 1)부터 1460년(세조 6)까지 함경북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남긴 기록으로, 조선 전기의 북방 정책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묘소]
김겸광의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광산김씨 선산에 있으며, 그 앞에는 김겸광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영사암(永思庵)은 김국광과 김겸광 형제가, 부모가 죽은 뒤 3년간 무덤을 지키던 자리에 세운 암자이다. 현재는 광산김씨의 사당으로 쓰이고 있으며, 1989년 4월 20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매년 김겸광의 불천위 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