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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63
한자 高仲英
영어공식명칭 Go Joongyoung
이칭/별칭 응시(應時),송설(松雪)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바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957년 - 고중영 황산사 배향
사당|배향지 황산사 -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01[원산동 268-4]지도보기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장흥(長興)

[정의]

조선 전기 전라도 광주 출신의 문인.

[가계]

고중영(高仲英)[?~?]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응시(應時), 호는 송설(松雪)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상지(高尙志), 할아버지는 고자검(高自儉)이다. 아버지는 형조좌랑(刑曹佐郞) 고운(高雲)이다. 형은 고맹영(高孟英), 동생은 고계영(高季英)이다. 아들은 고경조(高敬祖), 고경선(高敬先)이다.

[활동 사항]

고중영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효우(孝友)가 진실되고 문예가 뛰어났다. 1540년(중종 35)에 생원시에 3등 70위로 입격하였다. 과거를 보려고 할 때, 권신(權臣) 이량(李樑)[1519~1582]이 고중영 만나기를 청하며 도와주겠다는 뜻을 알리니, 이량을 꾸짖어 배척하고 과장(科場)에 입장하지 않았다. 이량은 명종(明宗)[1534-1567]의 신임을 바탕으로 당을 만들어 국권(國權)을 농간(弄奸)하였는데, 고중영이 그의 죄상을 비판하며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모함을 당하여 전라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1548년(명종 3) 10월 12일에 시독관(侍讀官) 윤옥(尹玉)이 아뢰기를, 전라도에서 생원·진사 등이 떼를 지어 다니며 여러 고을에서 폐단을 일으키는데, 세간에서 고중영과 김약(金約), 한두(韓㞳) 등을 세 여우[三狐]로, 권응평(權應平)을 쥐로 지목한다고 비난하였다. 이는 고중영이 정권에 배척당하는 처지를 보여 주는 일례이다.고중영은 귀양에서 풀려나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송설정(松雪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상훈과 추모]

고중영은 전라도 광주에 있었던 편방사(片坊祠)에 배향되었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 편방사는 광주의 동쪽 2㎞에 있으며, 정지(鄭地), 유사(柳泗), 고중영, 전상의(全尙毅), 유평(柳坪), 정충신(鄭忠信), 고경조(高敬祖), 유성익(柳聖翊) 등을 배향하는 사우(祠宇)였으나 1868년(고종 5) 철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방사는 경열사(景烈祠)의 이칭이다. 1957년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황산사(黃山祠)로 재건하여 고영중, 고경조, 고성후(髙成厚) 등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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