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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78
한자 朴忠廉
영어공식명칭 Park Chungryeom
이칭/별칭 효원(孝源),경암(鏡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9년연표보기 - 박충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박충렴 식년시 사마시(司馬試)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박충렴 정묘호란 때 양향유사(糧餉有司)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박충렴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47년연표보기 - 박충렴 사망
성격 의병장
성별
대표 경력 소모도유사(召募都有司)|양향유사(糧餉有司)|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

[정의]

조선시대 이괄의 난·병자호란 당시 활동한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박충렴(朴忠廉)[1579~1647]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효원(孝源), 호는 경암(鏡巖).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박이관(朴以寬)의 현손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숙(朴橚)이다. 외할아버지는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이다.

[활동 사항]

박충렴은 1579년(선조 12)에 전라도 광주[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서 태어났으며, 고종후(高從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0년(광해군 2) 32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소모도유사(召募都有司)로서 의병을 모집하고 양곡을 모았으나, 난이 평정되자 감영에 납부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표숙(表叔) 의병장 고순후(高順厚)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호소사(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 의해 양향유사(糧餉有司)가 되어 군량을 준비하였다. 전라도 전주에서 세자를 호종하다가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를 여산(礪山)까지 호위한 후 전라도 광주로 돌아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로서 병사를 이끌고 충청도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파하고 광주로 돌아왔다.

1637년(인조 15)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박충렴의 효행을 천거하여 현릉(顯陵)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647년(인조 25)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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