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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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基豊 |
영어공식명칭 | Lee Gip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목사.
[개설]
이기풍(李基豊)은 1868년(고종 5) 11월 21일 평안도 평양부 순영리에서 아버지 이제진(李濟鎭)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1883년(고종 20)까지 개인 사숙에서 한학을 배웠다. 1893년(고종 30) 평양성 포졸(捕卒)로 모펫(Samuel Moffett) 선교사에게 돌을 던지며 박해하였던 사람이었으나, 1896년(고종 33) 함경도 원산에서 스왈렌(William Swallen)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조사(助師)[강도사(講道師)]가 되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숭의여학교 제1회 졸업생 윤함애(尹含愛)와 결혼하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전라남도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으며,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활동 사항]
1903년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07년 9월 17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때 이기풍을 비롯하여 서경조(徐景昨), 한석진(韓錫普), 양전백(梁甸伯), 길선주(吉善宙),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1회 독노회에서 목사 임직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때 이기풍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派送)되었다.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하여 1908년에 금성교회, 1909년에 조천교회, 1910년 성내교회 등을 설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5년 건강이 악화되어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지한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에서 휴양하였다.
1916년 8월 25일 제주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16년 9월 4일 목포 양동교회에서 개최된 제6회 전남노회(全南老會)에서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 청빙되었고, 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 양림교회 담임 목회자로 사역하다가 질병으로 사역을 중단하였다. 1919년 다시 건강이 회복되자 전라남도 광주 제중원 전도 목사로 순천읍교회, 고흥읍교회, 벌교읍교회, 제주도 성내교회 목사로 활동하였다.
이기풍은 1921년 제10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장, 1930년 제주노회 초대 노회장, 1933년 순천노회장에 선임되었다. 1938년 1월 7일 순천성경학교에서 개최된 제21회 제3차 순천노회 임시 노회 결정에 따라 전라남도 여천군 남면 우학리교회로 옮겼다. 1938년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40년 11월 15일 제2차 예비검속으로 순천노회 목사 17명과 함께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는데, 1942년 4월 모진 고초를 치르고 풀려났다. 1942년 6월 12일까지 우학리교회에서 주일의 성찬 예식을 집례하였다. 1942년 6월 20일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묘소]
이기풍의 묘소는 광주제일교회가 관리하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천궁리 산 15-1 제일동산 당회장 구역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