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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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元 |
영어공식명칭 | Kim Sangw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 김상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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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상원 광주 3.1운동 참가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 김상원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숭일학교 학생 |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운동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개설]
김상원(金相元)[1902~?]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3.1운동에 참여하여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활동 사항]
김상원은 1919년 전라남도 광주 숭일학교에 재학 중 17세 나이로 광주 3.1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상원은 수업 시간에 교사 최병준(崔炳俊)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자기 한 몸을 희생하여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자유를 위해 힘썼으니 그 교도인 우리는 어떠한 장애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 수행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며 광주 3.1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강의를 들었었다. 특히 교사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들에게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개시하였는데, 유독 우리 광주에서 잠자코 있으면 다른 동지의 비웃음이 어떠하겠는가? 마땅히 이 지방에서도 동일한 운동을 개시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 약 20장씩을 배포하였다.
광주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 부동교(不動橋) 아래 백사장에 있는 전라남도 광주 작은장터에서 장날을 기해 시작하였다. 이날 김상원은 독립선언서 등의 독립 취지가 담긴 격문, 독립가, 태극기 등을 광주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수천의 군중과 함께 광주천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모여든 군중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였다. 일제는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총칼로 진압하고 무차별 검속을 펼쳤다. 이때 김상원은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김상원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 박애순(朴愛順) 등과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일제는 시위 중 압수한 증거물로 손병희(孫秉熙) 외 32명이 연기한 독립선언서, 경고문, 최팔용(崔八鏞) 외 10명이 연명한 독립선언서, 청원서, 독립가 등의 인쇄물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구한국 국기, '조선 독립 만세'라 붉게 쓴 깃발, 구한국 깃발, 완성되지 않은 국기 등도 포함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증거물을 근거로 김상원에게 보안법 제7조와 조선형사령 제42조를 적용하여 징역 4월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김상원을 비롯한 시위 참가 중 최경애(崔敬愛), 양태원(梁泰元), 조공찬(曺公贊), 박재하(朴宰夏), 이주상(李周庠), 민성숙(閔成淑), 박창규(朴昌奎), 배광석(裵光錫), 양만석(梁萬石), 김필호(金弼浩), 고연홍(高蓮紅), 김양순(金良順), 이봉금(李奉錦), 강화선(康華善), 이나혈(李羅血), 최수향(崔秀香) 등에게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3.1운동 공훈을 기려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