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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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范潤斗 |
영어공식명칭 | Beom Yund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병남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범윤두(范潤斗)[1891~1958)는 전라남도 광주군 우치면 생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용전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광주만세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 경고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인쇄하는 일에 동참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피신 생활을 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만세 시위 현장을 목격한 김철(金鐵)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1919년 3월 5일 광주로 돌아와 이날 밤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金剛), 최병준(崔丙浚), 최한영(崔漢泳),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奎),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손인식(孫仁植), 송흥진(宋興眞) 등과 만나 서울의 독립 만세 시위 정황을 전하고,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 학교의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 참가 연락 등 사전 준비를 분담하여 추진하였는데, 범윤두는 이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의 준비를 맡았다.
1919년 3월 7일 밤에 다시 서정희의 집에서 범윤두, 김강, 김태열 외 12명이 모였으나 일제 경찰의 엄중한 경계로 인해 출판물을 1919년 3월 8일 만세운동 개시 당일까지 시장 내의 여러 곳에 배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자 독립운동 결행 일시를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반으로 다시 결정하고, 범윤두는 김용규, 최정두, 김종삼, 한길상, 최한영 등과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무렵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장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 등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였다. 범윤두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장 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 군중이 늘어나고, 시위 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다.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범윤두는 일단 피신하였다가 2차 독립 만세 시위를 위하여 1919년 3월 17~18일 송정면 선암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선암동]에 있는 박경주(朴京柱)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500여 장과 「독립가」 500여 장을 등사하여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 등 계속하여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수배를 받고 피신하였다.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 재판으로 열려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장기간에 걸쳐 피신 생활을 하다가 1933년경 붙잡혀 투옥되었다. 1958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