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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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奉奎 |
영어공식명칭 | Kim Bonggyu |
이칭/별칭 | 공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효선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 김봉규 기삼연 의병진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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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9월 23일 - 김봉규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일본군과 전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2월 7일 - 김봉규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순사주재소 기습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2월 2일 - 김봉규 기삼연 의병장 전사 후 의병장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말 - 김봉규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으로 압송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봉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산군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호남창의회맹소 중군장|기삼연 의진 의병장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항일 의병.
[개설]
김봉규(金奉奎)[?~?]는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공삼(公三)이라 김공삼이라고도 불렸다. 1907년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고, 1908년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진을 이끌었다. 가협산(加峽山) 궁벽한 산중에서 살아 아는 사람이 적었으나 김봉규를 아는 사람들은 강개하고 절개가 높았다고 말했다.
[활동 사항]
1907년 9월 전라남도 장성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이 재차 봉기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김봉규는 의병진 내에서 병기와 군량을 조달하고 군사를 모집하는 등의 일을 하였으며,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23일 의병진의 선봉장이던 김태원(金泰元)과 함께 전라북도 고창군에 위치한 문수암(文殊巖)으로 진격하던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같은 해 12월 7일에는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法聖浦)에서 순사주재소를 기습 공격, 주재소를 소각한 뒤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광주시 서천교(西川橋) 밑에서 전사하자 박도경(朴道京) 등과 함께 잔여 의병을 수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에 추대되어 의병진을 이끌게 되었다. 김봉규는 각지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남도 광산군 지역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09년 2월 12일 뜻을 같이하였던 김영엽(金永燁) 의병장이 전라남도 장성군 운문암(雲門庵)에서 유종여(柳宗汝)에게 살해되자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909년 말 김봉규는 일본군에게 박도경과 함께 체포되어 경상북도 대구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일본군이 회유를 시도하자 김봉규는 "나라의 신민으로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천지간의 바른 도리"라고 응하며 그 절개를 끝내 굽히지 않아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