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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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峯洞王子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염승연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8월 27일 - 「용봉동 왕자대」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봉동에 거주하는 김영주의 이야기를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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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용봉동 왕자대」 『광주의 전설』수록 |
관련 지명 | 왕자대 -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
채록지 | 용봉마을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봉동 |
성격 | 설화|지명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태조 왕건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봉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왕자대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개설]
광주광역시 용봉동[광산구]에 있는 왕자대(王子臺)에 관한 두 가지의 지명설화이다.
[채록/수집 상황]
광주광역시 광산구 용봉마을에서 김영주[남, 78세]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 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수록하였다.
[내용]
용봉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광주군 마곡면(馬谷面)과 동각면(東角面)을 합치면서 동녘 ‘동(東)’ 자와 골짝 ‘곡(谷)’ 자를 사용하여 동곡면(東谷面)이라 하였다. 또한, 용봉마을은 본래 마곡면 평산리였는데, 용동리와 합쳐져 지금은 용봉동(龍鳳洞)이 되었다고 한다.
왕자대(王子臺)의 유래에 관하여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태조 왕건이 이곳 왕자대가 있는 곳에서 즉위했다고 하여 왕자대라 불려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조 왕건이 견훤군과 싸웠던 장소가 왕자대였다고 하여 불려진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산천' 항목에서 왕자대와 왕조대(王祖臺)를 함께 언급하였다. 김정호에 따르면, 왕자대는 신라 시대의 신무왕(神武王)[?~839]이 청해진의 장보고(張保臯)[?~846]에게 의지하면서 반정을 도모한 곳이며, 왕조대는 고려 태조 왕건이 뜻을 세운 곳이다. 김정호는 왕조대를 왕건의 유적이라 하고, 왕자대를 김우징[신무왕의 이름]의 유적으로 보았다. 왕건은 뒷날 왕이 되었지만, 왕자는 아니었고, 김우징은 본디 경주의 왕족이었던 것을 염두에 둔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1910년대의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의 마곡면 용동리(龍洞里)에 왕자산 기록이 있다. 현재까지도 왕자대의 위치나 유래에 관한 의견은 분분하다. 『나주목지(羅州牧志)』를 번역한 향토사학자 정윤국(丁潤國)도 학산리를 '왕자대'라 했으나, 이곳 전설에는 신라 왕자가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싸울 때 유진(留陣)한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윤국은 구체적으로 이곳 복바위가 37m에 이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왕자대에 관한 역사적 기록과 현장의 구전자료를 보았을 때, 학계에서는 김정호가 『대동지지』에서 기록했던 신라 왕자대와 고려 태조의 왕조대에 대한 설명이 서로 뒤바뀐 것으로 본다.
[모티프 분석]
「용봉동 왕자대」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왕건과 견훤이 나주 노안(老安)과 광주 동곡(東谷) 사이의 지역에서 싸웠다는 구전설화가 전승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배를 이용했던 왕건이 동곡면과 노안 사이의 강변에서 활동했을 것이라는 예측을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