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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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等山-證心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다빈 |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동쪽에서 무등산 중머리재를 오르는 산길에 있는 광주와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
[개설]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 증심사는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동쪽에서 무등산 중머리재를 오르는 산길 왼편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송광사의 수말사이자 광주를 대표하는 전통사찰이다. '증심'은 '마음을 증득하다'라는 의미이다.
1910년 일제 강점기, 만해 한용운(1879~1944), 석전 박한영(1870~1948), 혜찬 진진응(1873~1941) 등이 일본의 왜색불교에 반대하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을 펼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을 천명하는 모임을 증심사에서 열었다. 그들의 임제종 운동은 한국불교의 개혁운동, 민족운동의 정신적인 근원이 되었다.
[연원]
증심사는 860년 통일신라 말기 사자산문을 열었던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하였다. 1094년 고려 시대 혜조국사 담진이 증심사를 중창하였으며, 1443년 조선 세종 때 광주 목사였던 김방이 3차 중창 및 중수를 하면서 오백나한과 16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에 봉안하였다.
증심사는 정유재란 때 화마를 입어 오백전만 남고 나머지 건물이 소실되어 이후 1609년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선사가 4차 중창하였다. 19세기 『무등산도(無等山圖)』[영남대박물관 소장]에 나타난 증심사는 전각과 누각이 매우 밀집해 있다. 증심사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오백전과 회승당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970~90년대에 복원을 하였다. 1970년 주지 승려 현광과 신도들의 노력으로 대웅전과 지장전을 복원하는 중창불사를 시작으로, 지장전, 승방, 일주문 등이 복원되었다. 1983년에는 새로 지어진 범종각에 범종을 주조했으며, 1986년에는 비로전을 중수하였다. 1989년은 요사채인 적묵당과 행원당을 복원하였다. 2012년 사천왕문을 복원하고, 2017년에는 증심사 템플스테이 문화관을 새로 지었다.
[시민과 함께하는 증심사]
증심사는 종교, 수행 프로그램과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다. 사찰의 일상과 한국의 옛 문화 전통의 삶을 체험하는 템플스테이도 2008년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생명과 환경을 사랑하는 종교인 모임 음악회 무등산 풍경 소리는 지난 2002년 7월 이후 지금까지 165회에 걸쳐 개최하고 있다. 또한 대외 봉사 활동으로는 청소년들을 위한 행복한 피자가게, 청년들을 위한 목요 무료 급식 등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자비신행회와 공동으로 주관하여 코로나19로 인해 방역의료진들과 방역기관을 위한 응원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광주' 하면 무등산을 떠올리고 '무등산' 하면 증심사를 떠올린다. 그렇게 무등산과 증심사는 민초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큰 위로로, 굴곡진 역사를 헤쳐 왔으며, 그 위로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증심사는 앞으로도 ‘지혜로 진리를 깨닫는다’는 증심이라는 이름 뜻의 의미를 실천하며 부처님의 자리로 광주시민들과 함께할 것이다.
[유적 및 문화재]
증심사는 도량 전체가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는 여러 차례의 전란과 화재로 유실된 유물이 많았다. 보물 제131호 증심사 비로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은 1934년 옛 전남도청 근처의 대황사(大皇寺)에서 옮겨왔다. 대웅전 우측 원통전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칠층석탑은 1966년에 서봉사지(瑞峯寺址) 혹은 대황사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증심사에는 시대를 달리하는 석탑 3기가 있다. 창건 당시 건립되었던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 삼층석탑과 고려 후기에 제작된 오층석탑, 조선시대 건립된 범자 칠층석탑이 있다.
그중, 오층석탑에는 탑으로서의 가치보다 이곳에서 나온 보물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1933년 일제 강점기 때, 해체 수리를 하던 중에 탑 안에서 금동불 2구, 오층철탑[19㎝], 소형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세주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에 일제 강점기 문화재보호법인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에 의거해 1936년 보물 제211호 금동석가여래입상, 보물 제212호 금동보살입상으로 지정되었다. 해방 후, 1955년 보물로 지정되었던 문화재들이 일괄로 국보로 승격될 당시, 두 불상도 국보 제211호, 제212호로 승격되었으나, 한국 전쟁 때 경찰서 금고에 보관하였던 불상이 분실되었다. 이에 1957년 문화재위원회 조사 이후에 국보가 해제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일주문 : 깨달음으로 가는 첫 관문]
증심사 일주문은 1980년대 다시 복원되었으며, 무등산 증심사(無等山證心寺) 현판의 글씨는 남도 동국진체의 맥을 이어온 용곡(龍谷) 조기동(1929~2019) 서예가가 썼다.
[부도전 ; 증심사에 공덕을 지었던 사람들]
증심사 부도전에는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와 승려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6기의 부도(浮屠)와 17개의 비석이 있다. 과거 증심사 부도전은 취백루 아래쪽 공터에 있었으나, 현재는 일주문 좌측 언덕으로 옮겨 놓았다. 6기의 부도 중 3기는 승려의 부도이고, 3기는 신도들의 부도이다. ‘수월당 부도’는 ‘수월당보문’이 새겨진 탑호만 있을 뿐,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은 없다.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조형물이 파격적이다. 일반적인 거북이의 모습을 단순화한 데다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꼬아 민화 속의 거북이를 보는 듯 해학적인 느낌이 든다.
월암당 부도는 ‘월암당대사민성’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도이다. 뒷면에는 ‘강희 56년 을미 5월에 세움(康熙五十四年五月日乙未立)’이라 쓰여 있어 1715년(숙종 41)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승려의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증심사 유물 가운데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그 가치가 높다. 4면 중 정면과 양쪽 측면은 다소 변형된 연화문을 시문하였다. 후면에는 인면을 조각하였는데, 주먹코에 왕방울눈으로 웃는 모습이 흡사 장승의 얼굴처럼 표현되었다. 규봉당 부도는 석종형 모양으로 산신각 옆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 당호로 보아 증심사와 규봉암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3기의 신도의 탑[부도]은 1900년대에 세워졌다. 고려 시대의 석탑 양식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으나, 일본식 영향을 받았다. 각각의 이름과 연도는 다음과 같다. 康津崔氏之塔(강진최씨지탑: 1914), 曺氏淨行華化塔(조씨정행화화탑: 1919), 大德華安魂塔大德華漢陽趙南洙(대덕화안혼탑 대덕화 한양 조남수: 1927). 1950~1960년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재가신자들의 납골탑이 대웅전 앞에 세워졌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증심사에 시주한 공덕이 클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처럼 부도전을 통해 증심사를 위했던 사람들을 알 수가 있다.
[증심사를 수호하는 사천왕상과 사천왕문]
증심사 도량 내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한 건축물인 증심사 사천왕문과 사천왕상은 본래 1609년에 중창한 정문 누각인 취백루 1층에 모시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증심사 주지 승려 일철과 승려 진화는 2003년부터 사천왕문 복원불사의 원력을 세우고 2006년부터 사천왕상 복장봉안을 위한 사경 100일 기도를 봉행하였다. 그 후, 증심사 집단시설지구 이전공사로 공사재개가 늦어졌던 사천왕문 복원 불사는 승려 지장이 주지로 부임한 2009년부터 다시 재개되어 그해 8월 6일 상량식을 봉행하였다. 2011년 사천왕상 채색 및 단청불사를 시작하여 2012년 2월 23일에는 사천왕상 복장 유물 안치 재현 의식을 치렀다. 사천왕상 불복장은 불복장 전통의식을 전수받은 용화사 주지 도원 승려 수진이 집전하였다. 다음 날 증심사 주지를 역임하였던 승려 영조, 승려 지장, 당시 주지였던 승려 연광, 동구청장 등 500여 명의 대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천왕상 복장 봉안 및 점안식을 봉행하였다. 증심사에 사천왕문을 복원하기 전에는 광주광역시에 전통적 사천왕문이 있는 사찰이 없었다. 민족사의 우여곡절과 함께 사라져버린 사천왕문을 복원하고 다시 온전한 사천왕상을 모셨다는데 의미가 있다.
[취백루 ; 증심사를 다녀간 사람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맨 처음 맞이하는 취백루는 뜰 앞의 잣나무가 있는 누각이란 뜻을 가졌다. 시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누각 취백루의 명칭은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의 시구에서 취해진 것이라 전한다. ‘뜰 앞의 잣나무’라 한 것은 선불교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지침서로 유명한 「무문관(無門關)」 제35칙에 나오는 정전백수(庭前栢樹)를 차용한 것이다.
취백루는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된 후 1609년(광해군 1)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세 승려의 원력으로 다시 세워졌다. 이후 6.25전쟁으로 또다시 불에 타버린 취백루는 1998년에 정면 5칸에 측면 3칸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 현재 상층은 신도 교육과 템플스테이 체험 등으로, 하층은 종무소로 사용 중이다. 현판은 광주광역시 출신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의 작품이다.
취백루에는 당대에 유명한 문인, 암행어사, 전라도관찰사, 광주목사, 고을 현감들이 다녀갔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곳에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 흔적은 시, 유람기 등으로 우리에게 예전의 취백루의 모습과 증심사의 풍경들을 떠올리게 해준다. 또한 시 속에서 사찰이라는 공간은 서로 교유하는 장소이자, 마음 치유의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렇듯 많은 시문과 유람기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 무등산유람기 「유서석록」의 구절을 소개해 본다.
1. 김극기(金克己)[?~?]
栢樹庭前翠 뜰 앞의 잣나무는 푸르고
桃花陌上紅 길가의 복사꽃은 붉도다
何須搜券外 밖에서 찾으려고 애쓸 것인가
只要覓環中 다만 마음 안에서 얻어야 하리
滯境心終塞 경계가 막히면 마음도 끝내 막히니
忘言道始通 말을 잊어야 비로소 도가 통한다오
何人名此寺 어느 누가 이 절의 이름을 지었나
妙蘊獨深窮 오묘함을 홀로 깊이 궁구했도다
2. 고경명(髙敬命)[1533~1592]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의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걸쳐 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에라도 온 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는 글귀에서 따온 듯하다. 다음 날 도착한 광주목사를 취백루에서 맞이하였다.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 있는 것이 보기에 한가롭고 좋았다. 이것이 비록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지 않으나 취백루라는 이름에 손색이 없다.
3. 노수신(盧守愼)[1515~1590]
路入山無等 길에 드는 산에는 차등이 없고
心知寺有禪 절집에 선승 있음 마음이 아네
閑忙各半日 선승과 속객의 각자 한나절
喜懼獨中年 기쁘거나 두려우나 중년이로다
兵甲黃塵裡 누른 먼지 이는 곳 병기와 갑옷
煙霞白水前 맑은 물 앞에 이는 안개와 노을
臨分把雲衲 헤어지려 스님과 두 손 잡으니
淸嘯向晴天 맑은 휘파람소리 갠 하늘 향하네
4. 금명보정(錦溟寶鼎)[1861~1930]
無等千年寺 무등은 천년 절이라
風樓又月林 바람 부는 다락에 달 아래 숲
冷泉爭瀉雨 찬 샘물 마치 비 쏟아지는 듯하니
居釋要澄心 사는 스님 마음이 맑아질 수밖에
龕燈消永夜 석등 불빛 긴 밤에 사라져 가고
玉磬奏絃琴 옥 풍경만 거문고를 연주하누나
絶頂如今上 지금 만약 산 꼭대기 올라간다면
可聞梵界音 범계의 부처 말씀 들을 수 있으리
[지장전과 회심당의 기이한 동거]
지장전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지장전’과 ‘회심당’ 두 개의 현판을 달고 있다. 절에서 옛 스님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사당은 흔히 볼 수 있으나 수행자가 아닌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증심사에는 일찍이 일반 신도를 위한 사당인 회심당이 있었다. 그러던 차에 6.25전쟁 때 불타버린 지장전을 지을 마땅한 방법이 없어 옆에 있던 회심당을 헐고 지장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지장전 안에는 회심당 주인 부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회심당 주인의 이름은 정만재와 정만재의 부인인 하동정씨이다. 정만재는 조선 시대 왕실의 친척들을 위해 설치한 관청 돈영부의 관리였다. 정만재의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지장전 한 부분에 걸린 ‘회심당기’를 통해 그가 절 안에 따로 사당을 지어 기릴 만큼 증심사를 위해 큰 몫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이라는 화가이다. 채용신은 조선 말기 고종, 흥선대원군, 최익현, 황현 등 내로라하는 이들의 초상화를 그린 당대 최고 화가였다. 채용신은 관직에서 물러나 전주에 머물던 때인 78세[1927년]에 이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현재 초상화는 오랫동안 잘 보존하기 위해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현몽으로.. 오백전과 오백나한]
광주 제일의 기도 성지인 오백전은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였던 김방(金倣)이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오백전을 불사하였다. 정유재란, 6·25전쟁 당시 다른 전각은 불에 탔으나 증심사 오백전만 불에 타지 않아 영험하다고 이름나 있다. 증심사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닫집이 없으며, 대들보에 나한을 안치하였다. 또한 증심사 오백나한은 모두 흙으로 빚었다. 전라남도에서 조선 초기에 지어진 오백전은 증심사가 유일한 것이어서 더욱 귀중하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9년 3월 20일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오백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십대제자 16성 중 오백나한을 모심으로써 많은 기도객들이 참배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에는 오백나한에게 공양을 올리는 오백나한대재도 봉행하고 있다.
[증심사 석조보살입상 ;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을 드리면 보이는 관세음보살]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증심사석조보살입상은 증심사에서는 관세음보살님으로 통하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과 같이 높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세부 표현이 간략해진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성춘경은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전면에 화불이 새겨진 것을 고려해 관세음보살로 판단한다”고 전했다.
증심사 석조보살입상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66년 간행된 『광주시사』에 따르면 "담양 서봉사지터에 있던 것을 현준호[광주의 부호이자 호남은행의 2대 은행장]가 자신의 재산을 들여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박선홍의 책 무등산에는 "전라도 도청에서 대황사로 옮겼다가 폐사된 뒤인 1930년대 초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광복 전후 주지였던 종산, 최용식 승려에게서 필자가 직접 들었다고 적혀 있다. 석조보살입상이 증심사에 처음 모셔졌을 때 위치는 오백전 왼쪽, 칠층석탑의 옆자리였다. 1990년대 사진을 보면 보관, 눈, 코, 입 등의 형태가 온전히 보였으나 바깥에서 몇 십 년 이상 서 있으며 풍화로 훼손되었다.
2003년 오백전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웅전 오른쪽에 원통전을 지어 모셨다. 2021년부터 원통전에 연등을 달아 연등불을 밝혔다. 현재는 풍화로 훼손되어 석조보살입상의 형태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정성을 들이면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로운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산신각 : 무등산 산신을 모시는]
2004년 10월 20일, 증명법사로 전 송광사 방장 승려 보성, 호남 지역 불자 15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점안법회를 봉행하였다. 산신각을 중심으로 왼쪽 벽화는 산신과 동자, 천녀를, 오른쪽 벽에는 어미 호랑이와 아기 호랑이 두 마리를 귀엽고 친근하게 표현하였다. 나머지 벽에는 천녀와 모란, 연꽃, 매화 등을 그렸으며, 서까래는 청색으로 칠해 금색으로 사군자를 그려 놓았다. 증심사 산신탱화 속 산신은 백발의 수염과 눈썹에 머리가 벗겨지고 손에는 하얀 깃털 부채를 들고 있어 도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산신각 뒤 암벽에는 ‘서석산신지위(瑞石山神之位)’라는 조성 연대를 알 수 없는 음각 명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