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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가옥의 멋이 살아있는 최승효가옥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64
한자 傳統家屋-崔昇孝家屋
이칭/별칭 최승효가옥,자이당(自怡堂),사동 최부잣집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현숙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가옥.

[개설]

양림동은 광주에 서양 문물이 유입되던 근대기에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조화로움으로 서구 문화와 예술이 가장 먼저 꽃피웠던 공간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문화·예술의 향기가 공존하고 있다. 1920년대에 양림동에 건축된 이 가옥은 근대기에 세워져 서양과 중국, 일본 등 다양한 문물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던 시대적 배경이 나타난다. 이에 전통적인 한옥에 더하여 중국·일본의 전통적 건축 요소도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립자인 최상현(崔相鉉)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시민운동을 지원했던 광주 지역의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68년 최승효가 매입하게 되어 ‘최승효가옥’으로 등록되었다. 이 가옥은 안채로 자이당(自怡堂)이라 부른다. 일반 살림집으로는 매우 큰 규모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남부식 구조인 일자형으로 좌향은 동향이다. 전면 6칸 측면 4칸의 크기로 팔작지붕에 골기와 지붕으로, 대지 면적은 3,000여 평이다. 가옥의 평면을 보면 왼쪽부터 방 1칸, 대청 2칸, 방 2칸, 1칸 반이며, 식당 방을 배치하고 지하에 부엌이 있다.

[최승효가옥의 특징]

최승효가옥의 배치는 완만하게 올라가는 지형의 중간에 자리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지형을 이용하였다. 건물 왼쪽으로 지형과 연결되어 있고, 오른편 측면으로는 지형의 높낮이가 있어 그 공간 차이를 이용하여 반지하로 부엌이 있다. 건물 전체의 외형을 보면 오른쪽으로 부엌이 있어 2층의 높이를 위아래로 나누지 않아 전체적으로 넓은 면이 있어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건물은 전면과 좌후면을 마루로 두르는 형태이나, 측면과 후면에 칸을 두어 고방을 두었다. 대청마루에서는 막힘없이 앞뒤가 마루로 이루어져 답답하지 않다. 또한, 건물이 일률적인 일자형이 아니고 오른쪽 지하로 부엌을 배치하여 입면에 변화가 있게 구성되었다. 반지하의 부엌으로 접근하기 위해 계단이 마련되었는데, 위아래로 식당 방과 부엌이 있는 경계까지만 전면에 계단을 설치하고, 이를 직각으로 분리해 측면에 부엌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설치하고 이를 소맷돌로 장식하였다. 건물의 후면도 부엌에서 대청마루 쪽으로 경사져 있어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최승효가옥을 건축할 당시 건축자재는 백두산과 압록강 근처의 금강송이다. 건축자재로는 최고의 자재로, 목재가 썩지 않도록 목포 앞바다에 3년간 바닷물에 담가두고 관리할 정도로 건축하기 전부터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가옥의 위치는 사직공원(社稷公園)구동 광주공원(龜洞 光州公園)의 동남쪽 하단에 자리한다. 가옥의 후원 위쪽으로 인접하여 사직단이 복원되어 있고, 옛 사직수영장의 터가 남아있다. 집 앞에는 조탄강[광주천의 옛 이름]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전통가옥의 풍수를 따랐다. 훗날 강이 직강화되면서 인근이 매립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최승효가옥을 구성하는 특징은 네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는데, ‘건축, 자연환경, 인문학, 문화와 예술적인 미래 가치’ 등의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다.

1) 건축적 요소

최승효가옥에 들어서면 전면의 높이와 넓이의 1/3을 차지하는 계단이 강한 인상을 준다. 건물을 짓기 위해 경사지에 전면 마당을 평탄하게 한 다음에 건물의 전면에 계단을 1m 정도로 높여 배치하고, 그 위에 기단으로 두 단의 장대석을 놓아서 전체 높이가 더 위로 올라간다. 이러한 높이로 인해 접근하기 쉽지 않게 하여 가옥 주인의 권위를 높여주는 표현을 하였다. 이러한 건축 요소는 궁궐에서 위계를 표현하기 위해 놓은 월대와 같은 형식에서 볼 수 있다. 기단 위에 2단 원주석으로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마루는 오른쪽 식당 방을 제외하고 삼면으로 마루를 둘러 설치하였고, 필요에 따라 문을 달아 공간을 구별해 고방 등으로 활용하였다. 대청마루의 창호는 한여름에 공간의 환기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장석으로 만든 걸쇠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마루는 층고(層高)가 높고 넓어 강당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양쪽으로 방을 배치하였다. 건물 오른쪽 끝에는 식당 방과 그 아래로 반지하의 부엌을 배치하여 건물이 양쪽으로 대칭되지 않고 건물 오른쪽만 반지하로 연결됨으로써 비대칭의 변화가 있다.

창호를 보면 서향인 뒷면에는 마루를 놓고 미닫이 창호 문을 만들고 문 상부에는 석양빛을 차단하면서도 이 때문에 실내가 어두워지는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상부에 영창(映窓)을 두어 빛을 끌어들였다. 대청 거실은 지붕 밑까지 볼 수 있는 연등 천장이고 대청을 제외한 양쪽에 배치된 방의 위쪽에는 큰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락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아보면 마루에서는 볼 수 없게 마루에 칸이 분리되게 문을 달고 고방처럼 만들어져 있다. 마치 방처럼 마루 끝에 방 하나 정도의 넓이로 마루를 분리하기 위해 여닫이문을 달아 경계해 놓아 이 문을 열어야만 다락으로 가는 마루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루방 내부에서는 사람 눈높이보다 더 높게 다락 입구가 조성되어 있어 한눈에 띄지 않으며, 입구가 또한 높아서 쉽사리 접근할 수 없다. 다락 천장도 높다.

가옥을 장식하는 요소를 살펴보면 마루 끝의 측면에는 일렬로 둥그런 머리의 장석을 일정 간격을 두고 박아 장식하였다. 마루에는 붉은 색감을 띠고 있는데, 이는 옻칠 색감이다. 이러한 섬세한 시공으로 옻칠의 방수 기능이 있어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잘 보존되고 있다. 높은 층고의 겹처마인 서까래 모퉁이인 마구리와 서까래의 끝에는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동판으로 만든 귀면 장식을 덧대어 마감하는 방법으로 부재를 보호하였다. 팔작지붕에는 진홍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강진 옹기로 된 골기와로, 일반적인 기와집 지붕과 색감이 다르게 나타난다. 팔작지붕의 박공은 통풍을 위한 작은 창문과 벽돌 등으로 장식하였다. 지붕의 용마루 중앙에는 한 점의 청자 기와가 얹혀있어 특별하다.

2) 자연환경 요소

가옥의 자연적 구성 요소로는 석간수와 수목이다. 집의 오른편으로 부엌 뒤란에 천연 저장고가 있다. 사시사철 흐르는 차갑고 맑은 석간수가 있는데, 한여름에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여 부엌과 가까운 이곳에 저장 공간을 마련하여 오래전부터 이용하고 있다. 늘 마르지 않고 흐르고 있으며, 해자처럼 집 옆을 돌아 나와 집 앞마당의 작은 연못에 이른다.

후원으로 가는 길로는 네 갈래 길이 있는데, 이를 따라가면 6개의 마당을 만날 수 있다. 그중 부엌에서 나와 아치형의 석교를 건너면 약 250년이 넘은 수령의 향나무와 위로는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는 5~7m 높이의 우람한 기암괴석을 볼 수 있다. 좀 더 경사지를 오르면 정면에서 무등산을 볼 수 있는 장소도 있다. 집 안의 수목으로는 전체 대지가 동산으로 은목서 금목서, 소나무, 향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왕대가 이장우가옥과 울타리를 이루며 서 있다. 가을이면 기암괴석 앞의 붉은 단풍이나 최인준의 작업실과 갤러리 앞에는 거대한 잣나무와 은행나무가 계절을 잘 느낄 수 있게 변화하여 그 운치를 더하며 서 있다.

3) 인문학적 요소

가옥을 건립한 최상현은 독립운동가이자 당시 중국과의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재력가였다. 그의 부친인 최명구는 많은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사동 최부자로, 지금도 사동최명구의 가옥이 남아있다. 최명구최승효가옥이 건축된 뒤로 매일 들러서 일본인들과 자주 연회를 베푸는 한편, 다락에 독립군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독립군과 다락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일회성 이야기가 아니며, 부자(父子)가 독립운동가로 평가를 받는 이유로 또 다른 활동을 들 수 있다.

최상현은 이 집을 지었을 무렵인 1921년 4월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동 100번지에 광주흥학관(光州興學館)을 건축했다. 최상현이 부친인 최명구의 환갑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세워 각종 문화예술 공연과 교육사업을 위한 야학까지 운영하였다. 흥학관은 종교나 정치적 성향과도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개방함으로써 광주에서 문화와 교육, 청년들의 활동과 시민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24년 부친 최명구의 사망 이후에도 남긴 뜻을 이어 1942년까지 흥학관을 운영하였다. 이는 독립군을 숨겨준 다락방의 일화와 흥학관 운영과 지역사회에서의 최상현의 역할과 연관하여 보면 당시 식민지하에서 지식인이자 부유층의 의무와 역할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가세가 기울어 당시 광주MBC 설립자인 최승효가 매입하게 되었는데, 맨 먼저 후원인 뒷산에 가득하던 대나무가 꽃이 피어 죽어가고 있어 비탈진 후원을 정비하면서 여러 수종의 나무를 식재하는 조경공사 및 가옥에 대한 보수공사를 3년여의 기간에 걸쳐 보수하였다. 가옥 명의자인 강운(康耘) 최승효(崔昇孝)는 1936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전라남도 광산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동곡공립심상소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1960년까지 동곡면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광주광역시의 동구 장동, 옛 광주읍성의 동문인 서원문 앞에 광주MBC를 설립하였으며, 1968년 8월부터 1982년 2월까지 사장직을 지낸 이후 1988년까지 회장직을 맡았다. 평소 문화재와 사료에 관심이 높아 많은 문화재를 수집하였으나, 1980년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방송국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사옥 5층에는 문화재 연구실이 있어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문화재 자료가 전소되었다. 이후 최승효는 가옥의 다락에 남아있던 문화재 자료를 모아 정리하였고, 후원에서 가장 높은 곳의 언덕 위에 약 200여 평의 공간에 그동안 모아온 문화재나 자료를 전시할 박물관을 세우고자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이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강운 최승효의 기증품을 종류별로 정리해 보면, 유명 서화가들의 작품부터 저명한 문인 학자들의 서간(書簡)과 유묵(遺墨), 우국지사들과 독립운동가의 필적(筆跡), 고문서, 고서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중에는 황현 선생의 기록물과 한말의 항일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의 서간문으로 기삼연·김태원·기우만과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 순국선열 민영환, 광주학생독립운동가 왕재일의 편지, 의병장 전해산의 「전해산진중일기(全海山陣中日記)」, 민족대표 33인 양한묵의 필적 등의 자료가 있다. 특히, 매천 황현의 기록물을 정리하기 위해 전문 연구인에게 가옥의 대청 옆방인 서재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숙식 등을 제공하여 정리하게 독려하였고, 정리된 자료로 책을 펴내도록 주도하였다. 매천 황현의 기록물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黃梅泉 關聯人士 文墨萃編)』은 최승효의 기증 문화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자료이다.

4) 문화적 미래 가치 요소

다양한 문화적 활동이 일어났던 가옥으로 최승효가옥을 장식하는 중요 요소로는 현판이 있다. 집의 규모에 맞게 대청마루 앞에는 호방하게 쓰인 청풍백세(百世淸風) 대서현판과 마루칸 위쪽에는 중국의 4대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의 자이당 편액과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의 안분와(安分窩), 관란재(觀瀾齋),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집자된 현판이 마루 처마의 전면과 측면까지 걸려 있어 가옥의 품격과 예술적인 면모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는 최승효의 유지로 현판은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으며, 문화의 산실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을 이어 최승효의 삼남인 최인준이 현재 관리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커뮤니케이션아트를 공부한 최인준은 백남준의 제자로, 백남준의 작업을 돕던 중에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을 위해 스승인 백남준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때 본가인 자이당의 퇴락해 가는 모습에 이곳에 남아 15년을 넘게 꾸준히 가꾸며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옥 곳곳에는 영감을 담은 생태적인 작품들이 대형 그림판처럼 설치되어 있다. 최인준은 생태적인 작품이나 미디어아트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전통가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영국 국영방송인 BBC에서 취재해 가기도 했다. 전통가옥이라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과도 연결되어 전통과 현대 예술의 멋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장치이다.

[변이 과정]

최승효가옥은 건립 이후 여러 변화가 있었다. 가옥의 대지 변이를 살펴보면 집안 사정에 따라 필요 공간의 건축 등으로 여러 마당으로 남아있는 가옥들의 터와 지금도 가족들이 쓰는 공간들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대지의 크기와 비교해 문화재인 가옥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는 대문과 집의 진입부를 보면 길이와 너비로 볼 때 비례적으로 걸맞지 않다. 즉,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형태로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의 후면으로는 가파른 경사로가 각기 다른 층을 이루고 있고 그 층 사이에 6개의 마당이 있다. 대지의 기본적인 배치를 잘 활용하고, 앞으로도 가옥을 효율적인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공간에 대한 연구와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의의 및 평가]

최승효가옥은 개화기에 지은 전통적인 가옥의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가옥을 건축하고 100년의 오랜 시간 동안 근현대로의 이행 과정을 통해 건축, 역사, 자연환경, 인문학,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한 미래의 가치까지 살펴볼 수 있어 건축사적 자료의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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