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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애환을 달래준 해태 타이거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77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2년 1월 30일 - 해태타이거즈 창단|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3년 -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9년 - 다섯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 여섯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3년 - 일곱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 여덟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 아홉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8월 1일 - KIA타이거즈로 팀명 변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 열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 열 한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정의]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단.

[개설]

해태타이거즈는 1980년 5.18광주항쟁의 상처가 다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창단되었다. 1982년~2001년까지 해태타이거즈로 한국프로야구에 참여하였고, 2001년 8월 KIA타이거즈로 팀명이 바뀌었다.

해태타이거즈는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권에서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 야구단 창설을 주도한 가운데 호남지역을 연고지로 하여 탄생되었다. 구단의 명칭은 ‘정통성과 민족기상의 표상이 되는’ 호랑이를 뜻하는 ‘타이거즈’로 정하였다. 검정색 타이즈와 농군 패션을 한 그들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는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차별과 억압에 울던 전라도민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대리전이었고,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도 같았다.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을 집필했던 김은식 작가는 다음과 같이 해태를 회상하며 말한다. “꼴찌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해태타이거즈는 1982년 원년 KBO리그가 출범할 당시 김동엽 감독과 함께 16명의 선수로 창단하였다. 6개의 구단 중 가장 적은 선수였다. 16명이면 충분하다는 김동엽 감독의 자신만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프로 원년 내내 선수 부족으로 고생하였다. 감독과 코치진 간의 불화로 김동엽 감독이 한달 만에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를 뒤로, 미국에서 야구 연수를 마치고 온 김응용 감독을 선임하였다. 1983년 11월 3일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응룡 감독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팀의 개편을 착수하였다.

해태타이거즈는 스파르타로 일관하던 훈련에서 벗어나 김응룡 감독의 자율적인 훈련 방식으로 바꾼 결과. 1983년 첫 우승부터 2001년까지 9번째 우승을 구가한 ‘야구 왕조’를 건설하였다. 해태타이거즈에서는 7명의 정규시즌 MVP와 50명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명실상부한,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무적의 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해태타이거즈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우승하며 무적의 왕조를 건설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지역연고로 우선 지명을 하였다는 점이다. KBO에서는 지역연고의 팀이 우선 1차로 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드래프트 방식이 2010년도까지 실시되었다. 해태타이거즈는 전라도의 특출난 선수들을 우선지명 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0년대 이후 호남 지역의 아마추어 야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는 해마다 우수 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해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1차 지명을 통해 즉시 전력감의 유망주를 꾸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선동열, 조계현, 이강철, 이종범을 포함한 스타급 플레이어들의 지속적인 출현은 해태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강팀의 면모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2010년도 드래프트부터 우선지명제도가 사라지게 되었고 전면 드래프트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로써 한번에 모든 선수들이 각 팀의 지명을 받게 되었다.

둘째는 우승 DNA 및 지도력에 있다는 점이다. 해태 유니폼을 입은 지역의 선수들은 우승을 경험한 선배들의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량이 항상되었다. 선수단의 위계질서는 매우 엄격했으며, 이것은 매우 확실한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다. 일명 우승 DNA를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김응룡 감독의 카리스마는 최강의 실력을 자랑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을 하나로 묶었다. 코치진의 변화 또한 가장 적었던 해태타이거즈는 코치진의 연속성과 일관성 있는 지도 방식으로 팀을 이끌었고, 1986년부터는 유례없는 4년 연속 우승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셋째,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간절함이다. 압도적인 전력임에도 불구하고, 모기업인 해태의 연봉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해태는 선수들에게 연봉을 처음부터 ‘안 주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다른 구단에 비해서 적은 연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선수들은 한국시리즈의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 열망이 컸다. 해태 선수들이 받는 1천만 원의 의미는 1억 이상이었으며, 그들의 간절함은 한국시리즈의 큰 무대에서 반드시 이기겠다는 필사적인 각오를 만들었다. 이 간절함이 낳은 역효과였을까, 현재 KIA타이거즈가 된 시절까지 30년 동안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는 전승이었으나 준플레이오프 이하에서는 한번의 승리도 가져가지 못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만 2번의 승리를 거둔 것이 유일하다.

해태가 낳은 빛나는 선수들을 살펴보면, 첫째는 무등산 폭격기인 선동열이다. 팀에 선동열이 있는 것만으로도 해태는 우승 전력으로 평가되었다. 통산 방어율이 1.20에 달하며 0점대 방어율을 3번 기록하였다. 1986년의 평균자책점 0.99 262이닝 24승 6패 6세이브 214삼진 19완투 8완봉 sWAR 14.89의 외계인급 기록으로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34살의 나이에 최초로 해외 리그[NPB –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여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첫 해에는 고전하였으나 이후 세이브 2위까지 기록하는 등 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활동하다 은퇴하였다. 나고야의 태양이라고 불리웠던 선동열은 롯데의 상징이었던 최동원과 함께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였다. 1995년까지 해태타이거즈와 함께 6번의 우승을 함께하였다. 당시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으면 감독이 경기를 포기할 정도로 상대팀이 선동열을 향해서 가지는 공포심은 매우 컸다. 역대 최고의 투수로 뽑는데 이견이 없는 선수이다.

둘째는 바람의 아들인 이종범이다. 김응룡 감독은 이종범에 대해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투수는 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고 언급하였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5툴 플레이어로 불렸던 이종범은 당시 KBO리그에 역대급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종범은 90년대 중반 리그를 지배하였고, 야구 천재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선수였다. 이종범은 김재박-이종범-박진만-강정호로 이어지는 KBO 최고의 유격수 계보의 한 축으로 광주일고와 건국대를 졸업하고 1993년 해태타이거즈에 1차 지명으로 계약금 7천만 원을 받고 입단하였다. 주요 시즌의 기록으로는 1994년에 기록했던 타율 3할9푼3리, 도루 84개, 안타 196개, 득점 113점[모두 시즌 1위]이 있다. 이때 당시 이종범은 4할, 100도루, 200안타를 한꺼번에 달성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1997년에는 타율 3할2푼4리, 30홈런, 64도루를 기록하였다. 유격수로 최고의 수비력, 통산 500도루의 호타준족의 이종범은 해태 왕조의 후기와 KIA타이거즈와 함께 4번의 우승을 함께하였다.

셋째로는 한국의 베이브루스인 김성한이다. 해태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은퇴할 때까지 해태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던 대스타다. 1980년대 해태타이거즈, 더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의 초창기를 대표했던 스타선수로, 이만수와 함께 80년대를 양분한 원조 기록의 사나이다. 군산상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활약하던 김성한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통해 창단한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하게 된다. 타 팀에 비해서 선수층이 부족했던 탓에 팀 창단 초기에는 투수와 타자를 병행하였다. 이는 KBO에서 유일하게 투타겸업으로 좋은 성적을 내었던 선수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까지 KBO에서 본인 한 명밖에 없는 한 시즌 10승-10홈런-10도루-3할 타율-타점왕이라는 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성한은 오리궁뎅이 타법으로 유명하다. 홈런왕 3회[1985, 1988, 1989], 타점왕 1회[1988], 최다 안타 2회[1985, 1988], MVP 2회[1985, 1988]를 기록하면서 화려함과 꾸준함을 갖춘, 당시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었다. 이 전성기 시기에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한 시즌 30홈런과 20-20 클럽을 달성했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점이다.

넷째로는 무등산 핵잠수함인 이강철이다. 1989년 해태에 입단한 국가대표 3인방 중의 하나였다. [나머지 둘은 조계현과 이광우] 이강철은 1989년 데뷔 시즌부터 15승을 거두며 타이거즈의 통산 6번째 우승에 기여하였으며, 삼성으로 이적하기 전인 1998년까지 매년 150~200이닝을 기록하면서도 평균자책점은 최대 3.64만 기록할 정도로 기복 없는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해태 왕조의 9번째 우승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평균자책점 2점대도 2번이나 기록하였고 15승 이상을 5차례나 기록하였을 정도로 화려함도 갖추었던 선수였다. 10년 연속 10승 100탈삼진을 거둘 정도로 꾸준한 실력을 증명해보였다. 1996년의 경우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1완봉 평균자책점 0.56을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고, 투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강철은 통산 다승 3위, 통산 이닝 3위, 통산 삼진 2위, 통산 sWAR 6위, 통산 완투 6위, 통산 완봉 5위 등, 양적 통산 성적과 관련해서는 KBO리그에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대선수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대에 해태에서 함께 뛰었던 선배 선동열, 동기생 조계현, 그리고 후배 이대진과 임창용 등이 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본의 아니게 2인자로 인식되었다.

다섯째로는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인 조계현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해태타이거즈에 입단해서는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타이거즈 3대장의 역할을 맡았다.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1995년에 LG트윈스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 대 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1993~1996년도에 해태에서 최고의 1선발, 즉 대한민국의 에이스였다.

여섯째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사이드암이라는 평가를 받는 임창용이다. 임창용은 세이브 기록으로 성구회에 가입한 최초의 투수이다. 창용불패(昌勇不敗)이란 별명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투수로서 KBO 레전드 반열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선수이다. 1996년~1999년까지 100이닝 이상을 소화해왔고, 마무리 투수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97년 이래 세이브 순위에 늘 꾸준히 들어왔다. 오승환 등장 전까지 KBO 최연소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하였으며, 1998년에는 1점대 ERA도 찍었고, 1999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ERA 1위를 찍기도 하였다. 주전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하더니 1선발로 등극하였다. 혹사 의혹이 있었으나 일본에 진출해서도 160km의 구속을 유지하였던 놀라운 선수이다.

IMF와 함께 모기업의 재정 악화로 해태타이거즈는 2001년 8월 KIA에 인수되었다. KIA타이거즈로 팀명을 바꾼 후 2009년, 2017년 2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여 V11을 달성하였다. 2010년도부터 최초로 3군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2012년 함평 육성전용구장 기아 챌린저스 필드를 완공하였으며, 2016년 재활센터를 개소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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