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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372
한자 瑞石記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고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72년 - 김태석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3년 - 김태석 사망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기행문
작가 김태석

[정의]

근대 학자 김태석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서석기(瑞石記)」를 지은 김태석(金泰錫)[1872~1933]의 호는 난계(蘭溪),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저서로 『난계유고(蘭溪遺稿)』 4권 1책이 있다. 「서석기」는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구성]

「서석기」무등산 소개, 주상절리 형상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등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풍혈대, 규봉, 물외암, 증심사, 약사암, 원효사 등의 주변 승경, 그리고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로 이루어졌다.

[내용]

1. 무등산 소개

김태석의 「서석기」에는 유산에 대한 동기나 날짜 등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이 무등산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 일부 번역]

백두산 아래 삼천리에 한 흙덩이의 큰 사물이 있으니 이름하여 ‘서석’이다. 그 형세는 넓고 성대한 기세로 버티고 서서 절반은 흙이요, 절반은 돌이며, 풀과 나무 사이사이에 섞여 있으며, 기괴한 형태가 없으니 사군자가 마치 갓을 바르게 하고 손을 공손히 모아서 점잖이 예의를 갖춘 듯하였다. 높이는 육칠 척 정도요, 둘레는 백여 리 정도로 동쪽으로는 옹성에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오성에 굽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광부(광주)를 열었고, 북쪽으로는 창평을 이끌었다. 가장 높은 곳을 '천황(天皇)'이라 하고, 그 다음을 '지황(地皇)'이라 하며, 또한 그 다음을 '인황(人皇)'이라 하는데, 오랜 옛날에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반 보통의 산악과 더불어 견줄 수 있었겠는가. [白頭山下三千里 一塊巨物 名曰瑞石爲形也 扶轝磅礴 半土半石 間草間木 無恠奇形態 若士君子 正冠拱手 儼偉揖遜 高可六七尺 周可百有餘里 東接甕城 南彎烏城 西開光府 北引昌平最高曰天皇 其次曰地皇 又其次曰人皇 是太古無爲之名 烏得與凡常山嶽而比哉]

2. 주상절리 형상

김태석은 무등산 상봉의 바위, 입석대, 풍혈대로 이동하면서 주상절리의 형상을 이야기 한다. 이는 상봉에서부터 점차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으로 승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상절리의 모습을 그린 곳으로는 입석대와 규봉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본문 일부 번역]

천황봉의 맨 꼭대기에는 넓은 바위가 있어서 50~60명이 족히 앉고 누울 수가 있고, 곁으로는 32개의 입석이 있어서 높이가 각각 열 자쯤으로 신선의 모양을 한 불상을 각기 하고 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황은 시초에 어찌해서 이 형상을 이 땅에 부여하여 32의 숫자에 응했는가?"라고 한다. … 아! 충장공 김덕령의 절개와 금남군 정충신의 씩씩함도 모두 땅의 신령과 산의 도움으로 된 것이다. 우리 집이 여기에서 십여 리 내외의 땅에 떨어져 있어서 마치 가깝게 있는 듯 보이니 우뚝 솟은 산신령이 혹여 어둡고 어두운 곳에 도움을 주어 우리 자손으로 하여금 정공과 같은 사람이 얻어지기를 바라고 바란다. [天皇峰上 有廣石焉 可坐臥五六十人 傍有三十二立石 高各十許尺 仙形佛像 各有所爲 則所不知者 天皇之初 因何而賦此形像於此地 應四八之數耶 … 呼 忠壯金公之節 錦南鄭公之雄 皆以地之靈山之助 吾家之於此 距十餘里內外地 眼若咫尺 嵬嵬山靈 或有助於瞑瞑 使吾子孫 得如鄭公者 庶幾望焉]

[특징]

김태석의 「서석기」는 엄밀히 말하여 유산기로 분류하기 어렵다. 유산기는 기본적으로 유산을 하게 된 동기와 과정들이 뚜렷하게 나와야 하는데 김태석의 「서석기」는 단순히 무등산을 설명하고 무등산의 상봉에서 규봉까지의 산세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무등산을 경험하고 적은 글이기 때문에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나 유산기에 포함시켜 이야기한다.

[의의와 평가]

김태석은 「서석기」의 말미에서 "아, 충장공 김덕령의 절개와 금남군 정충신의 씩씩함도 모두 땅의 신령과 산의 도움으로 된 것이다,"라고 기술하며 무등산에 대한 당대 학자들의 인식을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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