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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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 最初- 女性 映畵監督 朴南玉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남상권 |
[정의]
경상북도 경산 지역 출신의 우리나라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과 그녀의 작품 이야기.
[개설]
경상북도 경산 지역 출신인 박남옥(朴南玉)[1923~2017]은 1955년 영화 「미망인」을 제작한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미망인」은 6·25전쟁 후 피폐한 사회현실 속에서 여성주체의 존재방식을 그려내고자 했다. 전후 영화에 남성의 시각으로 전쟁의 상흔을 안은 여성성이 묘사된 것과 달리 「미망인」은 도시 공간을 살아가는 여성주체의 물적, 성적 욕망과 가족 문제 등을 솔직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늘날 재평가 받고 있다.
[박남옥과 하양]
박남옥은 1923년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현 경산시 하양읍]에서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박태섭과 어머니 이두리 사이에서 십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이러한 대가족을 형성한 가정에서 보기 드물게 박남옥은 신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하양(河陽)은 영남 지역에서 보기 드문 평야를 가지고 있어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발달하였다. 인근의 금호·영천·대구 등으로 이어지는 넓은 평야와 많은 인구로 인해 시장이 발달하였고 일찍부터 근대적 화폐경제에 진입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박남옥의 부모가 포목상을 경영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또한 하양은 일제 강점기에 이미 섬유산업이 뿌리내려 발달한 대구와 인접하여 경부선 철도와 중앙선 철도, 그리고 대구로부터 이어지는 신작로의 이점을 넉넉히 누릴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길은 대구의 근대 교육기관으로 진학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박남옥 외에 영천 출신의 백신애(白信愛)[1908~1939], 경산 출신의 장덕조(張德祚)[1914~2003] 같은 근대 여성 문인의 탄생도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성장 과정]
하양에서의 학창 시절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6년 경북여학교에 입학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박남옥은 하양 또는 대구에서 초등교육을 마쳤으리라 짐작된다. 박남옥은 어릴 때부터 운동에 재능을 보였다. 경북여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활동하였고 체육대회에서 높이뛰기, 투포환 등의 종목에 출전하였다. 1938~39년에는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 등 전국체전에 투포환 선수로 출전하여 3회 연속 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하였다. 이렇듯 당시로는 범상치 않은 활동을 하였으나 박남옥의 부모는 딸의 운동선수로서의 길을 만류하였다.
박남옥은 어릴 때부터 운동 외에도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박남옥은 대구에 있을 때부터 영화와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북여학교를 졸업할 무렵 일본으로 가서 미술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다. 박남옥은 일본의 우에노미술학교[현 도쿄미술대학]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학교에서는 졸업 후 교사가 되는 나라여고사[현 나라여자대학] 외에는 추천장을 써주지 않았다. 이에 박남옥이 학교 몰래 우에노미술학교에 입학서류를 냈지만, 곧 학교로 반송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남옥은 일본 유학을 포기하고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진학하였다. 1943년 『동아일보』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입시 합격자 명단에 박남옥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은 박남옥이 미술과 영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시기이다. 박남옥은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영화를 보았다. 아울러 동양화가 현초(玄艸) 이유태(李惟台)[1916~1999]에게 일년 남짓 그림을 사사하기도 하였다. 박남옥은 이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로 독일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1902~2003]이 만든 베를린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꼽았다. 이 장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여성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에 박남옥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고, 이는 박남옥이 영화감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근대 여성으로서의 삶]
박남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이 결혼을 강요하는 등 대학시절이 순탄하지 않았다. 결국 1944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휴학하고, 그림을 배우러 일본으로 갈 생각을 하였으며 실제로 밀항선을 타는 등 여러 번 일본행을 시도하였다. 밀항을 눈치챈 가족에게 들켜 삼천포에서 붙잡혀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고, 이후 부산에서 다시 밀항을 결행하였다가 항해 도중 배가 좌초되어 일본의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는 박남옥의 대담한 결단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이후 박남옥은 대구로 가 대구매일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영화평을 썼다. 이 시기 박남옥은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져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화배우 김신재(金信哉)[1919~1998]의 팬이었는데, 이러한 인연은 훗날 두 사람의 우정으로 발전한다.
해방 후, 박남옥은 본격적으로 영화 관련 일을 찾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 시기 친구의 남편으로 알려진 윤용규(尹龍奎)[1913~?]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최인규(崔寅奎)[1911~?] 감독의 「자유만세」[1946]의 후반작업을 맡았고, 신경균(申敬均)[1912~1982] 감독의 「새로운 맹서」[1947]에 스크립터로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박남옥은 여성 영화인에 대한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맹서」에 스크립터로 참여할 당시 촬영팀이 포항으로 촬영을 갈 때 박남옥을 동행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박남옥은 국방부 소속 뉴스제작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후 1953년 영화 극작가로 활동하던 이보라와 결혼하고, 영화 촬영 현장에서 메가폰을 잡게 된다. 박남옥은 결혼 후 딸을 하나 두었지만 혼인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54년 남편 이보라와 이혼한 후 서울로 간 박남옥은 딸과 함께 살며, 동아출판사에 근무하였다. 이 시기 자비로 『스크린』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59년에는 영화잡지 『씨네마팬』을 제작하며 다시 영화 제작에 뜻을 보였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1992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2017년 4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영화 「미망인」의 제작]
영화 「미망인」[1955]은 제작 과정부터 풍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감독이라는 위치에 올라서기까지 박남옥을 단련시킨 시련이 뚜렷이 드러난다.
여학교 시절부터 가졌던 미술과 영화에 대한 관심, 대학 시절 영화에 입문하며 고조된 관심, 예술에 대한 집념이 불러온 밀항 사건 등은 박남옥이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기를 거치는 우리 사회 전반의 절대 빈곤시대에 대부분의 청년들이 상상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삶이기도 하다. 박남옥은 신문기자로서 전문적으로 영화평을 쓰며 배우 김신재와 만나 교유하고, 나아가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스크립터로서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6·25전쟁기에는 국방부 촬영부에서 활동하면서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다.
「미망인」은 1954년 박남옥이 딸 이경주를 낳고 사흘째 되는 날에 지인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전쟁 미망인에 대한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구상되었다. 전후 남편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가던 수많은 미망인의 삶은 당시 사회 문제이기도 하였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시나리오 작성과 배우 섭외, 촬영 등 전반을 단독으로 진행했다는 점은 영화에 대한 박남옥의 놀라운 집념을 보여준다. 또한 박남옥은 아기를 업고 15인분의 스태프 식사를 직접 챙기면서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제작비는 출판사를 운영하던 친언니에게 빌렸다.
16㎜ 흑백 영화로 완성된 「미망인」은 1955년 12월 10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박남옥은 “영화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예술을 논했지만, 막상 영화 제작에 들어가니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들고 반년을 미친년처럼 이리 저리 뛰며 보냈다”고 회상하였다. 「미망인」은 개봉 3일만에 간판을 내렸다. 「미망인」이 오늘날 재평가 되는 것과 달리 당시에는 흥행에 실패하였고, 박남옥은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
[「미망인」의 줄거리]
주인공 ‘신’은 도시에 거주하는 전쟁 미망인이다. 경제적 자립 기반이 없는 신은 남편없이 홀로 딸인 ‘주’를 키우며 생활한다. 신은 죽은 남편의 친구 이사장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친구 부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이사장의 부인은 신에게 질투를 느낀다. 이사장의 불우한 친구 부인에 대한 선의가 점차 남녀간의 애정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이사장의 애정을 물리치지만 이사장의 부인은 홧김에 젊은 청년인 ‘택’과 사귄다.
이사장의 부인과 택은 해변으로 놀러가게 되는데 같은 장소에 신과 딸인 주도 해수욕장에 놀러왔다가 주가 물에 빠지게 되자 택이 주를 구한다. 이를 계기로 신과 택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신과 택은 마침내 동거생활을 하게 되지만 택은 전 남편의 딸인 주를 싫어한다. 신은 택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딸을 옆집 남자에게 맡긴다. 그러나 택은 전쟁통에 헤어졌던 옛 애인 ‘진’과 재회를 하게 되고, 신을 버리고 옛 애인 곁으로 간다. 택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버림받음에 분노한 신은 과도를 들고 택에게 달려든다. 신은 살림도구를 리어카에 싣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떠난다.
[「미망인」에 대한 시선]
1. 당대의 시선
「미망인」은 6·25전쟁 직후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박남옥이 연출한 유일한 작품이며, 전후 피폐해진 도시의 재건과 일상으로의 복귀 과정에서 벌어지는 도시 상류 사회의 풍속을 세밀히 그려낸 영화이다. 「미망인」은 포스터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한국이 낳은 단 한 사람의 묘령의 여류감독 박남옥, 그가 짜낸 예술성 높은 최루 선정 낭만의 야심작!”이라는 문구는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전력을 다한 박남옥의 전 생애를 압축한 것이기도 하다. “다정다한 순결과 욕정과 희망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인간 미망인의 생태를 보시라!”는 문구 역시 윤리주의에 은폐된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애욕에 대한 박남옥의 직관을 솔직하게 드러냈지만, 관객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데는 실패하였다.
2. 후대의 시선
박지연은 박남옥의 「미망인」에 대해 “피난시절 부산에서 만든 이 영화는 여생으로서 욕망과 모생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보다 근대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주인공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하였다. 변재란 역시 “한국에서 미망인 관련 영화가 계속 제작되었다는 것은 8·15광복, 분단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가족의 해체와 함께 홀로 살아남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들이 늘어난 역사가 실재”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시의성을 논하고 있다. 아울러 ‘전후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적 근대가 여성을 재현하는 인식의 기원은 전쟁 직후 1950년대 영화 속에 재현된 미망인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고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에서 이러한 현실의 원형을 찾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박남옥이 감독으로 데뷔하고 「미망인」을 제작한 지 40년이 지난 1997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 「미망인」의 본격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박남옥은 이 영화제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정립되어 재조명되었고 유일한 영화 「미망인」도 복원되어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