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1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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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宗里-傳說 |
이칭/별칭 | 세나벌 바위와 김부자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은정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9년 -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 「세나벌 바위와 김부자」라는 제목으로 『경산지』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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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6년 -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 『경산문화유적총람』에 수록 |
관련 지명 | 세나벌 바위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 |
관련 지명 | 반룡사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1길 60[용전리 118-1] |
성격 | 지명 유래 전설|자연물 전설 |
주요 등장 인물 | 김 첨지|마을 사람들|탁발승 |
모티프 유형 | 탁발승 학대|금기의 위반|부자의 몰락|바위의 영험함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에 있는 세나벌 바위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은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 세나벌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이자 세나벌 바위에 대한 자연물 전설이다. 탐욕스러운 부자를 응징하기 위해 영험함을 지닌 세나벌 바위를 깨뜨림으로써 부자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 모두가 불행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 첨지라는 한 인간이 마을 전체에 야기한 커다란 재앙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 것인지 경계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6년 경산문화원에서 간행한 『경산문화유적총람』을 비롯해, 1989년 김한중이 엮은 『경산지』, 2002년 간행된 『경산의 전설과 민담』, 2005년 간행된 『경산 지방의 설화문학연구』에도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채록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내용]
경산시 용성면 대종리는 경산과 청도 지방을 동서로 길게 경계하는 위치의 반룡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와 연결되는 길목이 되기도 하는 곳이다.
조선 중기, 대종리와 소천리를 잇는 산 아래에는 조그마한 자연 부락이 있었는데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 마을의 좌향은 남향이고 마을 앞에는 세나벌이라는 언덕배기에 큰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세나벌 바위’라 불렀고 부락 이름 또한 ‘세나벌’이라 하였다.
세나벌 사람들은 이 바위의 덕분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넉넉하게 살림을 꾸려 갔고, 그중 세나벌 바위를 정면에 둔 김 첨지는 세나벌과 그 인근에서 가장 부자로 이름나 있었다. 김 첨지는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돈을 좋은 곳에 쓸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 모으기에 혈안이 된 김 첨지는 일족들의 논밭도 하나둘 빼앗아 집성촌의 대지주가 되었다. 소작료도 너무나 적게 주어 소작인들은 일 년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겨우 죽으로 연명해야 할 정도였다. 세나벌 사람들 모두 이러한 김 첨지를 미워했지만, 그로 인해 밥술이라도 먹게 되는 죄로 누구 하나 나서서 불만을 얘기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끙끙대었다. 이상한 것은 모두가 김 첨지를 미워하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김 첨지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갈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같이 김 첨지가 부자가 된 것은 마을 앞 세나벌 바위가 김 첨지 집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김 첨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김 첨지 집과 마주한 세나벌 바위를 몇 차례나 부숴 버리려 했으나 그때마다 천둥 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어 실패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궁리 끝에 인근 마을에 있는 반룡사(盤龍寺)에 올라가 주지승에게 세나벌의 김 첨지가 큰 시주를 하려고 한다며 거짓말을 했다. 주지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 첨지가 시주를 할 리 없다며 믿지 않으려 했다. 마을 사람들은 최근에 와서 김 첨지의 마음이 크게 변했으니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매달리듯 하자 주지승은 믿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들을 내려 보냈다.
이튿날, 몇 년 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절 살림까지 어려워진 반룡사는 주지승만 절집을 지키고 탁발승은 모두 시주를 받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한 탁발승이 문득 세나벌 주민들의 이야기가 생각나 김 첨지네로 발길을 돌렸다. 탁발승이 문전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주인 뵙기를 청하자 한 머슴이 급히 뛰어나와 이 집 주인은 소문난 노랑이라 시주는커녕 식은 밥 한 톨도 어림없다며 탁발승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다. 탁발승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계속 김 첨지 만나기를 청해도 머슴은 그럴 리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바로 그때 김 첨지가 돌아왔다. 김 첨지는 자기 집에는 시주할 것이 없으니 얼른 돌아가라며 탁발승을 내치려 했다. 탁발승이 또 다시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했지만 김 첨지는 그런 소리 한 적도 없고 자기 먹을 양식도 없다며 소리를 질렀다. 탁발승의 몰골을 아래위로 몇 번이고 흘겨보더니 옆에 있던 머슴에게 구정물 한 됫박을 떠 오라고 시켰다. 머슴이 떠 온 구정물 바가지를 빼앗다시피 하며 받아서는 문간에 서 있는 탁발승을 향해 냅다 뿌렸다. “옜다! 구정물 시주나 받아가라!” 하고 소리쳤다. 시주는 얻지 못하고 구정물 세례만 받은 탁발승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장삼 자락으로 얼굴을 훔치고, “재산은 모았으되 덕은 모으지 못했구려…. 나무아미타불….” 하고는 서둘러 김 첨지네를 나서는데 등 뒤에서 김 첨지가 삿대질을 하고 대문을 쾅 닫아 버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생쥐 모양으로 쫓겨난 탁발승의 앞길을 막으며 김 첨지의 나쁜 행실을 고치려면 그 집 앞에 있는 세나벌 바위를 깨어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애걸했다. 그러나 탁발승은 세나벌 바위를 깨어 버리면 김 첨지는 물론이고 이 마을 전부가 망할 것이라며 부탁을 거절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망하여 자기네들이 모두 불행해진다 해도 김 첨지와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며 또 다시 간곡히 부탁했다. 탁발승이 저 바위는 예사 바위가 아니라며 계속 머뭇거리자 마을 사람들이 탁발승의 길을 막고 자기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탁발승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업보는 자기들이 치를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매달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탁발승은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세나벌 바위를 향해 외마디 고함을 쳤다. “얍!” 그러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세나벌 바위가 두 동강이 났고, 갈라진 바위 사이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그 후 김 첨지는 이름 모를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 추운 겨울날 세상을 떠났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머슴의 지게를 타고 가 한 평 남짓한 땅 속에 묻혔다. 대궐 같은 집도 갑자기 불이 나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집에 불이 났을 때도 어느 한 사람 그 집의 불을 꺼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해마다 마을에는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고, 이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둘 이곳을 떠나 농토는 황무지로 변하였다. 김 첨지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자신도 망하고 같이 살던 친척들도 살 곳을 잃게 되었다. 탐욕스런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탁발승 학대’, ‘금기의 위반’, ‘부자의 몰락’, ‘바위의 영험함’이다.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은 광포 전설인 ‘장자못 전설’과 ‘손님 끊어 집안 망친 며느리’ 설화, ‘거북 바위’ 전설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이야기이다. 부자가 시주를 구하는 탁발승을 학대하고 관련 인물이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모두가 파멸의 길로 가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영험함을 보이는 바위가 거북의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 바위인 경우가 많은데 「대종리 세나벌의 전설」의 경우에는 지역명을 붙여 ‘세나벌 바위’라고 불린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행을 감수하면서까지 김 첨지의 몰락을 바라는 것은 부유층 내지 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를 바라는 향유층의 윤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